42조원 규모의 전력시장이 구조조정 압박 속에 민간으로의 이양 준비에 착수했다. 정부가 공공기관·공기업 기능 조정을 명분으로 한국전력 5개 발전사를 통·폐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민간 발전사의 전력시장 참여를 확대할 계획도 내놓으면서 무풍지대였던 시장의 변동성이 급격히 커졌다.
정부, 공공기관·공기업 구조조정 착수···6월쯤 윤곽
2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공공기관·공기업 기능조정의 후속조치로 에너지 분야 공공기관·공기업 구조조정에 돌입한다. 여기에는 한국남동·중부·서부·동서·남부발전 등 5개 발전 공기업에 대한 통합방안도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능조정 실무를 맡은 기재부 관계자는 "아직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 방안을 떠올린 것이지, 구체화된 게 아니다"면서도 "이르면 6월에 기능조정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5개 발전사의 통합을 언급한 적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업계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기능조정이 진행된 SOC, 농림·수산,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 52개 기관의 업무가 조정되고 녹색사업단 등 4개 기관이 폐지되는 등 쓰나미를 경험한 바 있다. 때문에 상반기 내로 에너지 공기업 기능조정 방안이 모습을 드러내면 5개 발전사 통합 또는 일부 발전소 통·폐합은 당연한 수순이란 게 업계 시각이다.
5개 발전사 직원들로 구성된 한국발전노동조합의 한 관계자는 "이미 발전소 쪽에서는 조만간 몇 개 발전소끼리 합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기재부 쪽에서도 일부 발전사에 통·폐합 의견을 묻고 직원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취재팀이 5개 발전사에 문의한 결과 강원도 강릉시 영동화력발전소(남동발전)와 동해시 동해화력발전소(동서발전), 전남 여수시 여수화력발전소(남동발전)와 호남화력발전소(동서발전)가 유력한 통합 대상으로 꼽힌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특정 발전사끼리 묶인다는 점에서 통·폐합이 가능성이 유독 큰 곳으로 전해졌다.
내수침체·수출부진 모르는 전력시장···기업들 '눈독'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국내 발전설비 용량은 9만8189㎿, 전력 거래금액은 41조6326억원 규모다. 2005년 발전설비 용량이 6만3504㎿, 전력 거래액이 17조2808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0년 새 용량은 57%, 거래액은 140% 급증했다. 같은 기간 자동차업종의 수출 증가율은 98%로 집계됐다. 자동차가 수출 국가대표 업종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력시장은 경기 부진과 내수 침체에도 불구하고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갔다.
사진/뉴스토마토
이러다 보니 미래 먹거리 찾기에 급급한 기업들은 전력시장을 눈여겨본 지 오래다. 기업에게 전력시장은 매력적이다. 국가산업을 지탱하는 필수 에너지원인 데다, 내수시장만 공략해도 충분한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수급의 불균형 속에 해마다 블랙아웃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뚜렷한 경쟁자 없이 높은 수익이 담보된다. 기업들이 저마다 에너지 신산업 육성을 외치고 정부에 규제완화를 요청하고 나선 까닭이다.
민간기업이 전력시장에 진입하고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등 다른 업종에서처럼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한전 독점의 전력시장이 허물어져야 한다. 전력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발전 공기업의 설비 비중을 낮추는 대신 민간 설비는 늘려야 한다. 반대로 태양광과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등 태동하는 신산업 분야에서는 가급적 공기업의 진출을 막고 민간이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정부와 기업의 잇속이 맞아 떨어진다. 정부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에너지 공기업들을 개편하고, 민간은 그 덕에 전력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경영 효율성을 전제로 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과제로, 시장주의 원칙을 지향한다. 전력시장 구조조정이 자칫 전력 민영화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아직 구체적 윤곽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발전 공기업 기능조정 방안의 하나로 발전사의 주식을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남동발전 등 발전 5개사 주식은 한전이 전량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중 일부를 상장해 민간이 발전 공기업의 주주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취지다.
정부에서는 아직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 나온 것뿐이라는 입장이지만 발전노조 측은 자본이 많은 기업이 발전 공기업을 소유하고 의결권을 가지게 되는 것 자체가 민영화라고 주장한다. 발전업을 영위하는 특정 기업이 발전 공기업의 주주가 될 경우 주주총회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입맛에 따라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전력시장 구조조정의 명분이 또 하나 늘었다.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1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신기후체제 합의문인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을 채택하면서 정부의 발걸음도 빨라지게 됐다. 이는 2020년 만료 예정인 교토의정서 체제를 대체하는 것으로, 온실가스 감축이 목표다. 우리 정부도 2030년까지 전망치 대비 37% 감축이라는 강도 높은 목표를 세웠다.
이에 화력발전 중심인 공기업 발전사로서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설비 변경 연구개발(R&D), 사업 구조조정, 이에 따른 신규 투자확대 등의 부담을 짊어지게 됐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석탄화력 발전 의존도는 총 발전량의 40% 수준. 국가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석탄화력 발전 의존도를 낮추는 전력시장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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