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강자로 군림하려는 러시아의 욕망과 그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서방의 전략이 맞부딪히면서 크림 현지 주민들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유럽이냐? 러시아냐?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표결을 앞두고 냉전의 망령이 되살아난 셈이다.
미국과 유럽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러시아에 대한 경제·외교적 제재를 강화했다.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는 모습은 냉전 시절 '마셜플랜'을 떠올리게 한다.
이에 러시아도 굴하지 않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있다. 근거리라는 이점을 이용해 이미 크림반도 곳곳에 병력을 배치해 두기도 했다. 무엇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강경책에 환호를 보내는 국내 여론이 러시아의 군사 개입 전략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크림이 어느 편을 선택할지, 우크라이나 사태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될지에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는 16일에 벌어지는 국민투표와 오는 5월25일에 열리는 총선 결과에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반대 시위, 곳곳에서 벌어져..분리독립 실패 암시
크림을 둘러싼 외부 세력의 알력 다툼이 심화된 가운데 9일(현지시간) 친서방 시위대는 타라스 셰프첸코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크림 자치정부의 수도 심페로폴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우크라이나 민족 영웅으로 불리는 타라스 셰프첸코는 생전에 "멈추지 말고 계속 투쟁하라" "그러면 그대는 승리하리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 대로 시위대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러시아 군사개입의 부당함을 다시 한 번 온 세계에 알렸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러시아 점령군을 추방하자"는 구호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위대는 푸틴을 '푸틀러'라고 부르며 그를 히대의 독재자인 히틀러에 비유했다.
시위대에는 러시아인도 있었다. 올해로 62세인 라리사는 "나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우크라이나에 사는 시민이기도 하다"며 "푸틴은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과연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에서도 이날 푸틴의 군사개입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아르세니 야체뉵 우크라이나 총리도 집회에 참석해 "크림은 우리의 땅이며 한 치도 내어줄 수 없다"며 "러시아 대통령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키예프 시민들이 독립광장에서 러시아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같은 날 한국에서도 러시아의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학생·직장인 40명은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에 모여 푸틴의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2시간가량 진행했다.
한국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는 슈물리아 룰리아는 "우크라이나는 평화적인 다국적 민주주의 유럽 국가"라며 "푸틴은 1994년에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어기고 우크라이나 땅인 크림반도를 차지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크림 의회가 진행하는 국민투표는 믿을 수 없다"며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위한 투표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고유의 정부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크림 시민들도 이날 질세라 심페로폴리 거리로 몰려나왔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들의 뒤를 봐주었다.
시위가 격화되자 이들은 "러시아 연방을 위하여"를 연호하며 친서방측 시위자를 곤봉으로 가격하기도 했다. 러시아파 시위대가 든 피켓에는 "푸틴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자"는 문구도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열일곱살 마리아는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의회를 파시스트 집단으로 규정하고 "크림은 러시아 땅이다"라며 "러시아 군대는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반서방 시위에 힘이라도 실어주 듯 이날 "러시아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크림 주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며 "러시아 합병 주민투표는 합법"이라고 재차 밝혔다.
◇러시아계 크림반도 시민들이 레닌 동상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울고 싶은 우크라 국민 뺨 때린 야누코비치..반러시아 정서 건드려
시위의 발단은 지난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러시아로 몰래 도주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EU) 대신 러시아를 선택하면서 친서방 성향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의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수도 키예프는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 찼다.
러시아와의 경제 공조를 통해 얻은 것이라곤 국내총생산(GDP) 대비 40%에 육박하는 부채 뿐인지라 적지 않은 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은 EU 경제에 편입되길 바랐다. 내후년 까지 200억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브렛 하우스 국제거버넌스혁신센터(CIGI) 선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곡물 생산 시스템이 노후화됐고 철강산업도 뒤처졌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FTA로 관세장벽이 거치면 경제가 점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거기엔 러시아 의존도를 낮춘다는 전략도 숨어있었다. 우크라이나 가스의 40%가 러시아에서 수입된다. 이러한 이유로 야누코비치 대통령 또한 EU와의 FTA를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야누코비치는 국민들과 EU 협상단의 뒤통수를 쳤다. EU 대신 200억달러 규모의 차관과 가스값 인하를 약속한 러시아를 택한 것이다. 친러시아 성향의 야누코비치에게 러시아의 압력이 가해졌다는 분석이다.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구조개혁이 너무 까다로웠다는 지적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EU는 커녕 구소련 경제권 안으로 재편입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야누코비치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지난 2월25일에는 그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친러시아 인사들이 들고일어났다. 야누코비치의 실각과 그 결정을 내린 친서방 색채의 중앙 의회를 받아들 수 없다는 것이다. 야누코비치도 그를 내친 의회를 인정할 수 없다며 친러시아 세력을 규합했다.
이처럼 한 나라에 두 개의 국민이 공존하고 있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은 과거로 돌아가야 이해할 수 있다.
1793년 부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은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야 겨우 독립했다. 러시아인들은 그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에 남아 지금은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무늬만 우크라이나인이지 속은 러시아 사람이다. 때문에 이들은 야누코비치 같은 친러시아 성향의 정치인을 선호한다.
◇"크림 분리독립 한다"..푸틴 지지율 2년래 최고조
크림 반도가 분리독립에 성공할지에 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크림 주민의 출신성분만 따져보면 분리될 확률이 높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크림 주민 중 59%가 러시아계다. 우크라이나인은 25%, 타타르인은 12%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조지아 사태가 반복될 것이라는 주장도 크림의 분리독립을 시사한다. 러시아는 지난 2008년 조지아를 무력으로 침공해 친러시아계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 압하지야를 분리시켰던 경험이 있다. 지금도 이 두 지역은 러시아 관할로 남아있다.
벤 유다 폴리티코 매거진 분석가는 푸틴(사진)이 크림을 힘으로 복속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푸틴은 미국이 유럽의 거래처를 바꾸게 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유럽 또한 초반에는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 내겠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크림 합병 이후에도 러시아와 거래를 재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푸틴이 이처럼 자신있게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 때문이다.
지난 1~2일 브치옴(VTSIOM)이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67.8%가 푸틴을 지지했다. 이는 2년래 최고치다.
◇서방 "국민투표 불법"..5월 총선 가봐야 우크라 명운 결정될 것
반면,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국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그 효력이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도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국들은 국민투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크림반도 주민투표는 우크라이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그 전에 협상단이 구성되지 않아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러시아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크림이 러시아에 종속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주장도 있었다.
영국 BBC는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이 탄탄한데다 미국과 EU가 뒤에 버티고 있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완전히 지배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투표 결과만을 가지고 러시아가 크림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국민투표 결과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후 벌어지는 총선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어느 정도 일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미국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유리하게 풀어갈 인물을 우크라이나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대선이 열리기 전까지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의 캠페인과 상대측 후보를 디스하는 시위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과 러시아의 선물 공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총선을 앞두고 경제난에 허덕이는 우크라이나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면 금전적 지원은 필수다.
서방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후보가 등장할 수 있으나, 당선 가능성은 낮다. 그 어느 쪽에서도 경제 원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어떠한 후보가 당선되든 서방과 러시아가 합의점을 찾을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았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8일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설득하는 중재자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이 경우, 러시아의 크림 지배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신 서방이 경제적 실익을 취하는 절충안이 마련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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