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사진=뉴시스)
최근 국제 분쟁의 양상을 보면 국제질서의 작동 방식이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요 분쟁이 발생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중심이 되어 국제사회의 대응 방향을 조정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간 이해 충돌로 인해 결의 자체가 채택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으며, 그 결과 국제사회의 대응은 점차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과 동맹 네트워크 중심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국제질서가 규범 중심에서 힘 중심의 요소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유엔 기능 약화 차원을 넘어 국제질서의 작동 원리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냉전 이후 유지되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다자주의와 국제법, 그리고 규범 기반 협력을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고 러시아와 중국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유엔은 주요 분쟁 사안에서 결정적 조정 기구로서의 역할 수행에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국제사회는 유엔 중심 질서와 동맹 중심 질서가 병존하는 복합적 이중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전개된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과 충돌 과정은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실질적인 조정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고, 주요 대응은 미국과 동맹국 중심의 억제 조치와 해상 교통로 보호 활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해상교통로 보호 문제에서도 다자적 유엔 체계보다는 개별 국가와 동맹 네트워크 중심의 대응이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국제질서의 변화 방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분쟁 가능성이 높은 동북아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면서 동시에 세계 10위권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한 대표적 중견국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 질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접근은 현실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안보의 핵심 축으로 유지하면서도 다자외교와 국제규범 기반 질서를 동시에 활용하는 균형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첫째,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중심축이다. 북핵과 미사일 위협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확장억제 체계와 연합방위 구조는 대체하기 어려운 전략 자산이다. 그러나 동맹은 단순한 의존 구조가 아니라 역할 분담과 공동 기여의 구조로 발전해야 한다. 한국은 해양안보, 공급망 안정, 첨단기술 협력, 조선·정비 분야 등 전략 영역에서 능동적 기여를 확대함으로써 동맹의 실질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둘째, 유엔과 다자주의 외교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강대국 중심 질서가 강화될수록 중견국에게는 국제규범과 절차 자체가 중요한 전략 자산이 된다. 한국은 비확산 체제, 해양질서, 사이버 안보, 공급망 안정 등 글로벌 의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을 확대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위상 제고 차원을 넘어 국가 생존 전략의 중요한 축이다.
셋째, 경제안보와 해양안보를 외교 전략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과 해상 교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호르무즈 해협과 말라카 해협과 같은 주요 해상교통로의 안정성은 곧 한국 경제의 안정성과 직결된다. 따라서 해양안보 역량 강화와 전략적 해상교통로 보호 능력 확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제다.
넷째, 소다자(minilateral) 협력 체계를 보다 전략적으로 세분화하여 적극 활용해야 한다. 예컨대 북미 지역에서는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조선·정비·군수지원 협력과 미 해군 전력 공백 보완형 협력, 유럽에서는 폴란드·노르웨이·루마니아 등과의 K-방산 공동생산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계 운용 협력,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UAE와의 함정 및 방공체계 중심 전략 산업 협력, 동남아에서는 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 등과의 해양안보 및 연안 감시전력 협력, 인도와는 인공지능(AI)·공급망·조선·우주·첨단 방산기술 협력, 호주와는 잠수함·해양감시 및 미국·영국·호주 안보동맹(AUKUS) 관련 산업 협력 가능성 확대 등 대륙별 맞춤형 소다자 협력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층적 협력 구조는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구조적 압박 속에서도 한국이 특정 진영에 종속되지 않고 전략적 선택지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이 되며, 동시에 한국형 방산외교의 공간을 넓히는 핵심 수단이 된다.
오늘날 국제질서는 더 이상 유엔 중심 질서만으로 작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힘만으로 움직이는 질서도 아니다. 규범과 힘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적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기에는 기존의 이른바 '안미경중'과 같은 단선적 접근보다 다층적이고 균형 잡힌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다자주의 외교와 중견국 연대를 적극 활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될 때 한국은 강대국 경쟁의 압력 속에서도 외교적 자율성과 전략적 선택지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으며, 불확실한 국제질서 속에서도 국가 생존과 번영을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문근식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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