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36개 공기업과 94개 준정부기관에 노동이사제가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민간 상장사로의 확산은 사실상 멈춰 있다. 논의가 재개될 때마다 경영계는 경영권 침해와 의사결정 마비를 우려하고, 노동계는 실질적 권한 없는 형식적 참여를 경계한다. 이 교착 상태의 근본 원인은 제도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노동 대 자본’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있다. 이 프레임을 전환하지 않는 한 논의는 앞으로도 공전(空轉)을 반복할 뿐이다.
프린스턴의 사이먼 재거(Simon Jäger)와 UC버클리의 벤저민 쉐퍼(Benjamin Schoefer)는 유럽 주요국의 공동결정제도를 실증 분석한 연구에서,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가 임금을 급격히 인상시키거나 기업 투자를 위축시킨다는 통념적 우려가 실제 데이터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핀란드의 사례에서는 제도 도입 이후 노동생산성과 기업 생존율에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결정적인 변수는 제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설계 방식’이었다. 권한의 물리적 이전보다 정보 공유와 소통에 초점을 맞출수록 노사 간 정보 비대칭이 해소됐고, 이는 협력적 성과로 이어졌다.
비교법적 시각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주주 자본주의의 본산인 영국은 현행 기업지배구조 코드를 통해 상장사 이사회가 근로자와 정기적으로 소통할 것을 요구한다. 방식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한다. 근로자 출신 이사 선임, 공식 자문위원회 구성, 혹은 전담 사외이사 지정,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채택하거나,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주주에게 설명(Comply or Explain)해야 한다. 강제 조항은 아니지만 이 연성 규범은 실효성 있게 작동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국 기업은 기존 이사회 구조를 가장 적게 변형하면서도 효율적인 ‘전담 사외이사’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2018년 코드 개정 당시 강제적 노동이사제 도입에 반발한 경영계와의 타협 산물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 유연성 덕분에 시장에 광범위하게 안착한 규범이 되었다.
두 가지 단서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한국의 민간 상장사가 상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무엇인가. 답은 현행 사외이사 제도 안에 있다. 정관이나 이사회 규정 변경만으로 선임된 사외이사 중 1인을 ‘근로자 소통 전담 이사’로 지정하는 방식이다. 이 모델의 설계는 세 가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 전담 사외이사는 특정 집단을 대변하는 ‘대리인’이 아니다. 노사협의회 또는 우리사주조합과 분기 1회 이상 정례 간담회를 갖고, 그곳에서 수렴된 근로자의 주요 관심사(고용 안정, 안전 보건, 보상 체계의 공정성 등)를 이사회에 정식 보고하는 역할이다. 이는 의결권의 재배분이 아니라 ‘정보 흐름의 제도화’다. 둘째, 전담 이사는 이사회 내에서 ‘협력적 견제자’로서의 위상을 가져야 한다. 재거와 쉐퍼의 연구가 확인했듯, 긍정적 효과는 근로자 측이 경영진과 대립하는 구조가 아니라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공동 목적 아래 협력할 때 극대화된다. 이 점이 이사회 규정에 명시될 때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와도 정합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셋째, 해당 이사를 이사회 내 ESG위원회나 보상위원회에 참여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인적자본 관련 의사결정에 현장의 시각이 실질적으로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으며, 이는 강화되는 글로벌 인적자본 공시 요건에도 부합한다.
양대노총 공대위와 대한민국노동이사협의회 준비위 소속 회원들이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확대 및 활성화 국정과제 이행 촉구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물론 이 모델이 완결된 해법은 아니다.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 가능성, 미공개 정보 유출 위험, 실질적 변화 없이 외양만 갖추는 형식화의 함정 등은 분명 진지하게 다뤄져야 할 과제다. 그러나 이는 제도 설계와 내부통제 시스템을 통해 충분히 관리 가능한 영역이다. 전담 이사의 역할을 ‘정보 매개자’로 정의하고, 소통의 가이드라인을 명문화하며, 보고의 실효성을 이사회 평가 제도와 연계한다면 이러한 우려들은 제도적 보완의 영역으로 수렴될 것이다.
완벽한 입법을 기다리는 동안 논의는 소모적인 찬반 공방에 매몰되어 왔다. 반면 이 모델은 지금 당장, 의지 있는 기업 한 곳의 결단으로 시작할 수 있다. 노동이사제라는 명칭이 주는 정치적 부담을 내려놓고, 인적자본 가치 극대화를 위한 이사회 혁신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한다면 경영계와 노동계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것이다. 이사회가 근로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것은 이제 노동의 문제를 넘어 거버넌스의 본질적인 과제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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