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어쩔수가없는 얼굴
2025-10-21 06:00:00 2025-10-21 06:00:00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기는 모순이 하나 있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모순. 바로 ‘얼굴’이다. 얼굴은 얼굴이되 전자는 생김새이고 후자는 인상이므로 이것은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이목구비의 잘생김이 마음의 잘생김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젊음을 잃어갈수록 자연히 알게 된다. 하지만 살아온 흔적은 반드시 얼굴에 남기 마련이므로 나이든 자의 얼굴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생김새가 좋았던 사람이 인상이 나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고, 생김새가 별로였던 사람이 편안하고 후덕한 인상의 소유자가 된 경우도 보았다. 후자의 사람들은 오히려 예전에 없었던 잘생김이 얼굴에 양각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잘 살아왔기에 잘 생겨진 것이다. 
 
‘얼굴이 곧 시간’이라면 문제는 짧은 시간을 산 사람의 얼굴이다. 세월이 아직 흔적을 남기지 않은 얼굴. 젊음은 못생긴 이목구비도 충분히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까지 알기 어렵다. <어쩔수가없다>에서 만수를,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영규를 우리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는 거야.”
평생을 몸담아온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 만수에게 재취업의 길은 정말로 전쟁과 같다. 실직된 대다수가 그렇지만 만수의 해고 사유도 개인의 무능력 탓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회가 만수를 전쟁터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재취업을 위해 만수가 저지른 ‘어쩔수없었던’ 행동을 두고 박수칠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만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신의 일과 가족을 사랑하여 환하게 웃으며 출근하는 만수의 얼굴에 악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우리는 만수의 얼굴에 그저 세월의 무게가 얹히기만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만수가 재취업한 직장에서 또 잘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영화 <얼굴>에서 영희가 남편인 영규를 향해 던진 질문이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인 척하면 그거는 나쁜 거예요, 착한 거예요?” 
영희가 답을 몰랐을 리는 없다. 우리도 그렇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 의문을 한 번쯤은 품어봤을 것이다. ‘척’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얼굴은 보여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영규를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된다.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은 반드시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얼굴이 ‘척’을 하든 안 하든, 그걸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든 없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기실 사람의 신체기관이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얼굴 이면에 감춰진 진짜 얼굴을 알아보는 일. 결국 마음이 하는 것이다. 마음의 시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에 있지 않다. 타인의 얼굴을 잘 살피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을 끊임없이 들여다봐야 한다. 악은 괴물의 얼굴로 오는 게 아니라 선한 이웃의 얼굴로 온다는 것, 그보다 더 무서운 진실은 선한 사람도 조건만 갖춰지면 악한 얼굴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 본성에서 나 자신도 자유롭지 않다는 겸손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내 보여도 보지 못할 것이다. 
 
“감정을 담아 그려진 모든 초상화는 모델이 아닌 화가 자신의 초상이다. 모델은 단지 우연일 뿐, 계기일 뿐이다. 화가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모델이 아니라, 색칠된 캔버스 위에서 화가 자신이다.” 
박찬욱, 연상호 감독은『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스카 와일드가 한 이 말을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당신의 얼굴은 어떠냐고. 당신이야말로 어떤 얼굴로 살고 있느냐고. 
 
이승연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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