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좋은 질문의 힘, 상호부조와 연대의 미래를 열다
2025-07-16 06:00:00 2025-07-16 06:00:00
부동산 거품 확대를 막기 위한 대출 규제 정책이 발표된 가운데, 이 정책이 고소득 흙수저의 내 집 마련 꿈을 막는다는 보도나 기사가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자신의 소득만으로 자수성가하려는 개인의 좌절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대출 규제 정책의 타당성을 공격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 보도는 질문을 던지고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론장을 여는 언론 본연의 기능과 관련해 치명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기에는 고소득 무주택자의 대출을 막는 것은 공정한가, 대출 규제가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정당한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집을 ‘사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혹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데, 이들은 한국 사회 공동체 구성원의 주거 안정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생산적 토론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나쁜 질문’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한국의 부동산 가격이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상승한 구조적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안정적으로 ‘거주하게’ 할 수 있을지, 소유 외에 장기 공공임대·토지임대부 주택·사회주택 등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할 수 있는 모델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공론장을 이끌었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세상의 원리는 경쟁인가 협력인가 등의 질문도 ‘나쁜 질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근본적인 긴장 관계를 포착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두 요소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나 제3의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들은 또한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 원리를 시공간을 초월한 고정불변의 실체처럼 다룸으로써 ‘어떤 조건’이 특정 행동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생산적 토론을 가로막고 소모적인 논쟁만 낳는다. 
 
더 나쁜 질문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인 ‘약육강식인가 상호부조인가’라는 질문이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사용한 ‘생존 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폭력적 싸움이 아니라, 생명체가 생존하고 자손을 남기기 위해 겪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포괄하는 용어다. 여기에는 숲속의 나무 한 그루가 햇빛을 더 받기 위해 다른 나무보다 더 높이 자라려는 경쟁, 동물이 혹독한 겨울의 추위나 가뭄을 이겨내려는 사투, 식물이 사막의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등이 포함된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도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반면, 사회진화론자들은 다윈이 말한 여러 생존 투쟁 중 한 가지, 즉 ‘같은 종 내부에서의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며 이를 ‘약육강식’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포장했다. 사회진화론은 가난한 사람이나 식민지 민족의 고통은 그들이 ‘열등’해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사회나 국가가 개입해 돕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이는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불평등을 합리화하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유용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고, 사람들을 각자도생의 나쁜 사회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에 따르면, 생존 투쟁은 ‘종 내부의 소모적인 개체 간 경쟁’과 ‘종 전체가 힘을 합쳐 혹독한 자연환경이나 다른 포식자에 맞서는 공동의 투쟁’으로 구분되며, 진화에서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후자이다.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지리학자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이때 공동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바로 ‘상호부조’(Mutual Aid)이다. 그는 개미와 벌의 사회, 무리 지어 사냥하는 늑대들, 함께 새끼를 지키는 초식동물 등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호부조’의 사례를 통해, 종 내의 경쟁을 최소화하고 협력을 극대화하는 종이야말로 ‘가장 적합한’(fittest) 종임을 입증했다. 
 
요컨대 자연 세계의 '조화'는 약육강식과 상호부조가 50대 50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종의 생존이라는 더 큰 목표 앞에서 종 내부의 직접적인 경쟁과 약육강식은 억제되고,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한 협력과 상호부조가 지배적인 원리로 선택되는 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발견한 자연의 지혜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가장 강한 자’나 ‘가장 교활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연대하여 서로를 돕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약육강식인가 상호부조인가라는 논쟁이나 상호부조론과 사회진화론의 대립은 ‘과학적 이론’과 ‘과학을 참칭한 이데올로기’의 대결, ‘보편적 가치 지향’과 ‘특수 이익 옹호’의 대결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을 무시하고 어느 쪽이 옳은가라는 토론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진화론이라는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부당한 자격을 부여하는 셈이며,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약육강식인가 상호부조인가’라는 ‘나쁜 질문’은 학교·지역사회·시장·기업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 모두의 존엄한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인 ‘상호부조와 연대’의 원리가 잘 작동하도록 규칙과 문화를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라는 ‘좋은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 정부가 국가의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할 때, 언론과 국민이 그 정책의 타당성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이 정책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는가, 아니면 각자 흩어져 싸우게 만드는가?” 모든 정책은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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