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받아쓰기’ 없는 첫 정부를 기대한다
2025-06-23 06:00:00 2025-06-23 06:00:00
이재명 대통령의 장점으로 활발하고 격의 없는 토론이 꼽힌다. 내란 위기를 극복한 정부이니만큼 여러 면에서 이전 정부들과 달라지기를 기대한다. 명칭도 국민주권정부이니 대한민국의 ‘질적 변화’를 구체화해야 할 숙명적 의무가 있다.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무슨 조치든 서슴 없이 해대는 트럼프 체제와  중동전쟁 등으로 정치·경제적 대내외 환경이 어느 때보다 어려운 가운데 새 정부가 출범했다. 예행연습 기간 없이 바로 국정을 운영하므로 진용 구축이 급선무다. 인사청문회 등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고 이는 단축 불가능하다. 진용 구축까지의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긴요하다. 역대 정부 모두 첫 인사에서 내상을 입으며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했다. 문재인정부는 진용을 꾸리기까지 무려 195일이 걸렸다. 5년 임기 60개월의 1/10이 인사 채우는 데 소모된 것이다. 
 
국힘은 계엄 내란 이후라는 특수성을 고려, 새 정부 출범 과정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윤석열 계엄 내란의 공동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국난 극복이라는 대국적 견지로 임하지 않으면 국민적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 정부 정책 과제나 일하는 스타일을 생각하면서 이런 장면을 상상해본다. 받아쓰기 없는 첫 정부. 혹자는 ‘한가한 상상’이라고 할지 모르나, 일하는 방식의 변화란 사고 체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질적 변화의 시작은 업무 방식의 변화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새 정부에 제안하는 바이다. 
 
이런 장면에 익숙해진 지 수십 년이다. 정부 각종 회의나 행사에서 대통령은 말하고 참석자들은 일제히 받아쓰는 장면.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잔재이자 군부독재의 허접한 유산이고, 피학적 권위주의의 상징이자 별 쓸모 없는 ‘과잉 충성 로봇’들이다. 다 떠나서, AI시대에 너무 구리고 촌스럽다. 왕조시대 어전 회의도 그러지 않았거늘 디지털 시대에 받아쓰기라니….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사뭇 근엄하고 진지해 보이려 애쓰는 로봇 장-차관들이나 공기관 간부들 보고 있자면 민망함을 넘어 모욕감이 느껴진다. 영혼 없는 예스맨들의 받아쓰기 매스 게임을 왜 몇십 년째 봐야 하나. 받아쓰기는 보수 계열 집권기 때 더 심했던 것 같다. 쿠데타 군부독재의 시작점인 공화당과 민정당의 후신이어서 그럴까. 아쉽게도,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는 사라질 줄 알았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받아쓰기가 예의나 충성심의 표현은 아니다. 상호 간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받아쓰기로 상징되는 상명하복 관료 사회와 ‘꼬붕-오야붕’ 질서가 관철되는 정치권의 ‘예스 온리’ 문화가 고쳐지지 않는 한 혁신이나 개혁은 요원하다. 일률적 받아쓰기는 응원봉 시위나 은박 요정으로 상징되는 ‘뉴 소프트 파워’와는 동떨어진 퇴행이다. 
 
받아쓰기가 구조화되고 일상화되면 토론이나 이견은 설 자리가 없다. 그저 지시와 이행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열린 사회’와 다양성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토론거리나 개진할 의견을 적는 메모와 받아쓰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획일적 행정이나 집행은 일사불란을 좋아한다. 받아쓰기가 업무 효율을 보장해주는 것 같지만 착각이다. 받아쓴 사람들은 각자의 임지로 돌아가 불러주기 말고는 더 하는 게 없다. 그건 효율이 아니라 줄 세우기 집행일 뿐이다. 무인 발급기 앞에서는 선택지가 없다. 정해진 대로 누르는 것밖에는. 창의나 열정, 개선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고칠 게 많다. 컴퓨터를 포맷하듯 전면적 사회 대개혁이 필수적이다. 정당 득표율과 의석 차지율의 왜곡을 부르는 선거구제의 정상화, 양극화 완화, 개헌,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의 각종 특권 폐지, 관료들의 70년 넘은 특권 폐지, 공교육 소생, 저출생 문제 등 새 정부가 직면한 과제는 첩첩산중이다. 다시 건국한다는 자세로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매듭지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게 계엄 내란 극복 과정에서 확인된 국민의 개혁 명령이자 시대정신이다. 받아쓰기로 상징되는 획일과 “각하, 지당하십니다”가 없어지는 첫 정부이길 기대한다.  
 
이강윤 정치평론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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