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업 지배구조 혁신’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뛰어넘는 길
2025-06-17 06:00:00 2025-06-17 14:27:52
탐욕은 선()입니다. 탐욕은 옳습니다.”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기업 사냥꾼 고든 게코가 말한 이 대사는 1980년대 자본주의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기업을 매수해 알짜 자산을 매각하고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 회사의 가치를 진정한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행위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영화는 고든 게코를 탐욕스러운 악당으로 그렸지만, 당시 수많은 젊은 금융인들은 그를 영웅이자 롤모델로 삼았다
 
이처럼 노골적이고 도발적인 외침의 지적 뿌리는 당대의 석학, 밀턴 프리드먼으로 소급된다. 프리드먼에게 기업의 주인주주이고,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주주를 위한 이윤 극대화였으며, 이윤 창출 이외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주주의 돈을 훔치는 행위였다. 명쾌하고도 강력한 이 논리는 기업의 영혼을 갉아먹는 반()사회적인 처방으로 이어졌다. 이윤이라는 단일 목표 아래, 직원은 줄여야 할 비용이 되었고, 환경은 마구 사용해도 되는 자원이 되었으며, 지역사회는 경영 판단 바깥의 부차적 문제로 전락했다
 
2008년 글로벌 미국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이러한 신념에 균열이 가며 기업의 본질·목적·주인과 관련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시작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사티아 나델라는 우리의 사명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조직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고객에 대한 헌신직원의 성장을 위한 공감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의 방향 전환은 투자자·직원·고객에게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하며 기업 가치 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는 해로 불리던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즈니스 모델 혁신에 힘입어 10년 만에 주가가 10배 이상 상승하는 부활을 이뤄냈다.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지구를 되살린다는 사명을 기업의 존재 이유로 천명하고 모든 경영 활동을 일관되게 정렬함으로써 노스페이스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존재하는 경쟁적 시장에서 놀라운 경영 성과를 증명할 수 있었다. 2019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 모인 미국의 대기업 CEO들이 주주 우선주의(shareholder primacy) 원칙을 폐기했던 것이나, 세계적인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가 기업의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투자의 핵심 척도로 삼겠다고 선언한 것은, 기업을 주주를 위한 계약체가 아니라 모든 이해관계자의 협력 속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적 유기체로 보는 견해가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음을 웅변한다
 
오늘날 한국 주식시장은 동종 글로벌 기업에 비해 주가가 훨씬 낮은,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늪에 빠져 있다. 이는, 한국에서 프리드먼의 이론이 대주주 우선주의라는 기형적인 형태로 굴절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구조의 왜곡으로 한국의 기업들은 협력적 가치 창출의 장이 아닌 지배주주 일가를 위한 사적 이익의 편취의 장으로 전락했고, 자본시장도 건강하게 발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의 상법 개정 논의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및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핵심 과제로서 그 의미가 크며, 최근의 주가 급등 현상도 이러한 움직임에 투자자들이 공명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추가함으로써 주주의 발언권을 강화하자는 제안은 병의 원인처방으로 삼으려는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크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오히려 법적으로 강화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며 공동선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주체로 거듭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구현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투트랙 접근법이 필요하다. 첫째, 일반 주식회사를 대상으로 한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 길의 목표는 기업을 공정한 협력의 장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사의 충실의무가 회사 전체와 모든 주주에게 향할 것을 명확히 하고,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 가능성이 큰 이해 상충 거래는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엄격히 심사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이는 지배구조 리스크라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조치이다. 여기에 더해 이사회에 직원 대표의 참여를 보장해 가치 창출의 주역인 직원의 지식과 경험이 의사결정에 통합되도록 하고, 우리사주 제도나 성과 공유제를 도입하는 기업에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기업의 성공에 기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정당하게 보상을 받는 촉진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견제와 촉진의 장치를 균형 있게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투명하고 효율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확립하고 기업의 내재적인 혁신 역량을 키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될 것이다
 
둘째, 특수목적회사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법 제정이 필요하다. 파타고니아처럼 이윤보다 사회적·환경적 사명 해결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 기업들은 기존 상법의 틀 안에서 법적 리스크에 노출되기 쉽다. 따라서 이들의 탄생과 성장을 지원할 가칭 공익목적회사법을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게임을 원하는 선수들이 활동할 새로운 경기장을 조성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 법은 정관에 명시한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그 성과를 투명하게 공시하도록 해 책임성을 부여하며, 공공 조달이나 임팩트 투자 연계 등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이는 사회 혁신을 이끌 새로운 유형의 기업을 촉진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혁신의 동력을 제공하고 자본시장의 다변화에 기여해 우리 경제 생태계 전반의 활력도 높일 것이다
 
이러한 투트랙 해법은 서로를 보완해가며 기업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고 자본시장을 선진화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강한 역동적인 경제 생태계를 만들 것이다. 상법 개정은 한국 기업 전체의 신뢰도를 높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특별법 제정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혁신기업들을 키워낼 것이다. 전자가 기존의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후자는 새로운 종자를 심을 밭을 일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러한 해법에 힘입어 낡은 규칙이 만든 나쁜 균형 상태를 벗어나 내실 있는 성장을 이루고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할 책임 있는 주체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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