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유명한 주장을 남겼다. 그의 주장은 무한히 지혜롭고, 완벽하게 선하며, 전능한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으니, 그것은 창조할 수 있었던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최선이 아니었다면, 신이 굳이 만들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주장의 설득력에는 의문의 남지만, 그가 남긴 ‘가능한 모든 세계’라는 매력적인 표현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신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보면,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현대 물리학에서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중요한 보편 원리인 최소 작용 원리를 닮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원리는 물리적 시스템의 상태가 변화할 때, 가능한 모든 경로 중에서 ‘작용’이라는 양이 최소화되는 경로를 따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빛은 두 지점 사이를 이동할 때, 가능한 모든 경로 중에서 시간을 최소화하는 경로를 따른다. 의식이 없는 빛이 최선의 경로를 선택한다니 자연의 효율성은 경이롭다. 행성의 움직임 역시 중력장 내에서 가능한 모든 경로 중 작용을 최소화하는 경로를 따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리학자 파인만은 이러한 원리를 양자역학에 적용한 경로적분의 이론을 개발했다. 이렇듯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자연 현상에 적용되는 이 원칙은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라이프니츠의 낙관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고 크게 비웃었던 사람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계몽시대의 논객 볼테르였다. 그의 풍자 소설 <캉디드>에서 순박한 청년인 주인공 캉디드와 그의 스승 팡글로스는 세계를 여행하며 전쟁, 지진, 전염병 등 계속되는 재앙과 고난을 경험한다. 그 무수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 팡글로스는 모든 것이 최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며 끊임없이 낙관적인 견해를 유지한다. 볼테르는 이들의 고난 가득한 여정을 통해, 이런 세계가 과연 최선인지 유쾌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38개 정당이 비례대표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린다. 투표용지의 길이는 51.7cm에 달한다. 정당 수가 많아질 것에 대비해 선관위는 34개의 정당까지 분류할 수 있는 신형 분류기를 도입했다. 하지만 투표용지가 예상보다 더 길어진 바람에 새 분류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지난 총선처럼 수작업 개표가 불가피해졌다.
이런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이토록 많은 정당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최선의 세계를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세계를 검토해 보겠다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의지의 표현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너무도 크다. 드높은 이상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정당은 투표 안내문에 자신들의 홍보물 한 장도 싣지 못하며, 선관위의 웹사이트에 정책을 정리한 간단한 문서조차 제출하지 않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최선의 세계를 찾기 위해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세계의 목록은 ‘모든 가능한 세계’에 비해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를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캉디드>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의 현실처럼 끝없이 부조리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 해맑은 낙관주의자뿐 아니라, 냉소적인 비관주의자가 공존하는 것도 세상의 모습을 똑 닮았다. 소설은 스승에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캉디드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철희 고등과학원 수학난제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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