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세종대왕님이 살아계셨다면
2023-11-28 06:00:00 2023-11-28 09:31:30
A씨는 독일로 유학 와 교회 음악을 전공하고 파이프 오르간 설치 전문가가 됐다.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이 파이프 오르간을 들이려고 할 때 A씨의 자문을 받는다. B씨는 한국에서 자동차 수리 기사 자격증을 따 30년 전 독일에 취업한 여성이다.
  
C씨는 한국에서 미술교사를 했고 작품전도 연 화가다. 네덜란드에서 회사를 다니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D씨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에 다니며 네덜란드 현지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로테르담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E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영국에서 금융 관련 정보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다니며 일하고 있다. F씨는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운동권이 됐다 신학 공부를 한 뒤 영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축복이라 생각하며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
 
독일, 네덜란드, 영국에 각각 사는 이들 재외동포는 삶의 이력도 다채롭고 살아온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중엔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바쁘게 일하고 주말 가운데 하루인 토요일은 온전히 한글을 가르치는 데 바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모두 유럽 한글학교 교사들이다. 
 
필자는 지난 5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유럽 한글학교 교장 연수와 10월 독일 에센, 네덜란드 로테르담, 영국 런던 교사 연수에 글쓰기 분야 강의를 하고 왔다. 재외동포 청소년을 위한 글쓰기 및 독서 지도 방법, 논리와 스토리를 활용한 글쓰기, 나의 이야기로 작은 자서전 쓰기 등이 주된 강의 내용이었다.
 
한글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의는 필자에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국내에서 한해 200여 차례 가까운 강연을 하고 있지만, 그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각별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한글학교 선생님들의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외동포 다음 세대들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지 고민과 모색의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시킨 것도,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닌데 한글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국내에서도 이런 경우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울러 아쉬움도 발견됐다. 재외동포 청소년을 위한 수준별 한글 교재, 글쓰기 말하기 교수법 및 학습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다 보니 학교나 선생님들이 각자도생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한계가 나타났다. 정확한 어휘력과 맞춤법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지, 아이들이 능숙하게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을 갖추는데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지 교육의 방향과 기준을 잡지 못해 혼란스럽다는 토로도 있었다..
 
한글학교 선생님들은 국어학이나 국문학, 한국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재외동포 다음 세대의 한글교육을 위해 길게는 몇 십 년, 짧게는 몇 년 동안 시간과 열정을 바치고 있다. 한글학교 선생님들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재외동포청, 국립국어원, 각국 대사관, 문화원, 교육원 등이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방향과 커리큘럼, 교재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한 차원 더 높은 인적, 물적 자원을 투여해야 할 일이다. 세종대왕님이 아마 살아계셨다면 한글학교 선생님들을 업어줄 만큼 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모국이 이들의 열정에 날개를 달아주는 획기적인 정책을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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