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요즘 ‘신냉전’이란 말을 많이 쓴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 과거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옛 냉전 시대와 비슷하다고 여기고 그 표현을 만들어냈다. 얼핏 보기에 과거와 지금이 비슷한 구석은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 언론과 학계 등에서 신냉전 표현에 담긴 의미를 함부로 확대하거나 과장한다는 점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서방 대 반서방 신냉전 격화, 중간지대가 사라진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기사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미국을 방문하고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찾은 소식을 전하면서 국제정세를 분석했다. 중간지대가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한쪽으로 서둘러 가담해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풍으로 다룬 기사를 접한 독자는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쉽다.
얼마 전 <연합뉴스>는 ‘한반도 관리냐 자유 진영 연대냐’라는 제목 아래 “한국도 자유 진영 일원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유 진영? 공산 진영 대 자유 진영이라는 옛 냉전 시대 표현을 그대로 썼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라는 말을 자주 쓰니, 언론이 덩달아 춤추는 건가.
국제 사회 현실을 보자. 옛 냉전 시기에는 공산권과 서방 나라들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안보와 경제 블록을 짜고 세력 대결을 벌였다. 지금은 다르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싱가포르 총리나 대통령이 몇 달 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외교를 했다. 영국과 일본도 중국과 경제 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 나라들이 나토 중심으로 결속한 건 맞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회의를 참관해보면 현안이 있을 때 관련된 여러 당사국이 모여 문제를 논의하자는 ‘다자주의’가 다수 의견임을 알 수 있다. ‘신냉전’ 발상을 갖고 이념 위주로 진영 대결을 꾀하는 나라는 소수다. ‘공산 진영 대 자유 진영’은 없다.
얼마 전 영국 유력지 <가디언>은 “일부 정치인이 신냉전 표현을 편안하게(comfortable) 생각한다”고 꼬집는 칼럼을 실었다. 대만과 북한, 일본 같은 일부 국가가 대표적으로 ‘신냉전 시대가 왔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그와 반대편이다. 어떤 대만 경제학자는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가 “미국 중심의 민주 기술동맹과 중국 러시아 중심의 적색 기술동맹으로 양분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실이라고 봐주기에는 너무 극단적인 이분법 아닌가. 대만은 국제 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냉전 대결 구도라도 짜이면 틈새가 열릴 거라고 기대하는 고육책 아닐까.
북한은 공식 문서에서 지금 정세를 신냉전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 미국 일본 대 북한 중국 러시아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손잡고 경제와 안보 측면에서 활로를 열기가 수월해진다고 판단해서다. 일본도 신냉전 구도가 일본 국익에 유리하다고 본다.
한국은 개방형 통상국가 전략을 통해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했다. 세계 모든 나라와 자유롭게 무역하고 투자를 주고받을 때 국익이 커진다는 점에서 한국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입지가 비슷하다. 신냉전 시대란 용어는 국제 사회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 구도는 우리 국익에 해롭다. 우리는 대만, 북한, 일본과 처지가 다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언어를 잘못 고르면 조바심에 빠져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다. 신냉전 시대니 무슨 진영이니 하는 경직된 표현을 오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박창식 전 국방홍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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