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날아봤어 떨어졌어 죽여봤어 돌아왔어/누워봐도 일어났어 죽어봐도 살아났어'(파란노을 '불면증')
부서질듯 여린 음성을 빼곡하게 뒤덮는 노이즈 음향의 숲. 음악은 스스로의 불안과 어두움을 감추기 위한 것일까.
우울이나 과잉(화려하고 맥시하게 꾸미는) 소재의 음악이 Z세대 사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사회에 대한 냉소, 디스토피아적 사고 발현이 예술로 전이된 것인지에 대한 담론들이 나옵니다. 결국 문화란 사회 현상의 거울이기에, 그 반영의 소산으로 봐야할까요. 그런데 서브컬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기괴하고 어두운 음악이 주류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은 의아하긴 합니다.
K팝에서도 최근 관련된 문화 코드를 앨범 콘셉트와 가사 곳곳에 은연 중 심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 내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가 최근 내놓은 신보 '이름의 장: TEMPTATION'. 어른으로의 성장을 다짐하지만 눈앞의 자유와 유희를 창가의 악마('Devil by the Window')나 달콤한 설탕('Sugar Rush Ride')에 은유하는 식. 보사노바 기타와 플루트 사운드로 시작되는 팝 랩(Pop Rap) 장르 '해피 풀즈(Happy Fools)'에서는 "살아가면서 삐뚤어지는 청소년 시기의 암흑기"에 대해 노래합니다.
"미래가 막막한 Z세대들이 공감해주면 좋겠다"고 밝힌 멤버들의 바람이 실현된 것일까요. 발매 첫 주 음반은 미국 빌보드 메인음반 차트 '빌보드200' 1위에 오르고, 3주 내내 '톱 10' 자리를 지키며 순항 중입니다. 물론, 거대한 K팝의 글로벌 팬덤 효과가 작용했겠지만, Z세대들의 공감 또한 뒤따랐을 겁니다.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한국대중음악 선정위원)는 "TXT는 그간 소년의 입장에서 마법 같은 상상이나 모험 같은 주제를 음악으로 풀어내며 Z세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그룹"이라며 "특히 신보의 우울과 좌절, 유혹 같은 문화코드는 태어날 때부터 모바일 기기와 소셜미디어(SNS)에 익숙했던 세대들이 고민하는 시대 정신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가 최근 내놓은 신보 '이름의 장: TEMPTATION'. 우울의 미학과 소년의 암흑기의 장치를 군데군데 심어놨지만, 피터팬 네버랜드를 콘셉트로 결국은 희망의 결말을 열어놓는다. 단순히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닌, 최근에는 소재를 낙관적인 열린 결말로 풀어내려는 시도들도 포착된다. 사진=빅히트뮤직
뉴진스 신드롬 이후 'Y2K 현상'(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하던 세기말 감성)이 일고 있는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긴 생머리, 네일, 팔토시 같은 과잉 소재들은 연일 음악과 패션, 광고계를 달굽니다. 내면의 어두운 정서를 감추려 오히려 일종의 과시 미학이 뜬다는 것. '제 2의 세기말'이란 표현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김도헌 평론가는 "아포칼립스(세계 종말을 뜻하는 용어)는 이전부터 사용되던 소재였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 제대로 학교생활도 못한 세대들에게는 달관과 회의주의, 가치관 혼란이 더 크게 와 닿았을 것"이라며 "다만 'Z세대가 즐겨 찾는 콘텐츠가 무조건 우울'이라는 일반화 내지 하나의 경향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싶다. TXT의 신보 역시 우울감이나 좌절감을 종국에는 긍정적 형태로 풀어내려는 측면이 있다"고 봤습니다.
장르 음악 신에서는 1인 국내 록 밴드 파란노을이 낸 신보 'After the Magic'이 연일 화제입니다. 파란노을은 미국의 유명 음악 평점 사이트 ‘레이트 유어 뮤직’과 미 음악 전문 매체 ‘피치포크’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세계 대중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 지글대는 노이즈에 자기 혐오의 노랫말들을 피워낸 포스트 록은 지금 세계에 닿고 있습니다. 방구석에서 컴퓨터와 미디로 찍은 음악에 어떻게 국내외 음악 팬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이대화 대중음악 평론가(한국대중음악 선정위원)는 "분명 기타가 강조된 앨범이 공연 때는 오디오 플레이백이나 미디 사운드로만 구현하는 것을 보면서 음악적으로는 실망스러운 점은 분명했다"며 "물론 우울의 가사가 비슷한 세대에게 어필한 점도 없진 않겠지만, 결정적으로는 얼굴을 알리지 않는 신비주의와 방구석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성공신화가 '덕후 팬덤'을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합니다.
1인 국내 록 밴드 파란노을이 낸 신보 'After the Magic' 앨범 커버. 사진=포크라노스
김도헌 평론가는 "전작('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우울하기만 한 정서와는 달리, 신보에서는 긍정적이고 밝은 메시지도 존재한다"며 "다만 여전히 맥시멀한 소음으로 자신을 숨기려는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오늘날 Y2K 현상과 자아 진정성 문제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봤습니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가 대중화되면서, 국내외에서도 TV만 틀면 좀비와 멸망에 관한 이야기 뿐입니다. ‘킹덤’, ‘블랙미러’, ‘기묘한 이야기’ 같은 기괴하고 어두운 콘텐츠가 세계 콘텐츠 시장을 선도하는 흐름은 이제 보편화가 됐습니다. 글로벌 음악시장에서도 2019년 무렵 빌리 아일리시 음악이 뜨면서 90년대 너바나 열풍 이후 ‘글루미 콘텐츠’에 대한 재조명이 부각됐습니다. Z세대의 사회적 좌절감이나 불안감이 반영된 디스토피아 콘텐츠는 오늘날 사회의 반영이라는 미디어 학술의 조명도 잇따릅니다.
뉴진스의 겨울 감성 곡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미장센으로 등장한 8mm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 뉴진스 신드롬 이후 몽글몽글한 영상미를 찾는 트렌드가 Z세대 사이 유행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맥시한 과장의 필터는 현실이 어려울수록 아름답고 예쁜 것을 찾는 'Y2K 향수'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X세대와 Z세대의 연관관계를 분석하는 흐름도 있다. 사진=어도어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최근 대중음악이나 영화에서 유행하는 세기말적 우울이나 과잉, 멸망 콘텐츠는 미증유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며 "다만 몇 해간 지속된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면서 이러한 제2의 세기말 콘텐츠나 과거의 좋은 시절을 회상하는 아날로그적, 혹은 레트로적 문화가 오늘날 청년세대의 사회심리적 좌절감이나 불안의 정서에 소구하는 흐름을 보다 분명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류 교수는 "1990년대 말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전후에 홍콩과 홍콩인들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불안과 우울한 사회적 기류, 내일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양가 감정을 다양한 은유와 상징, 암시를 통해 전달하려 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 같은 영화에서 발견된 현상과도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디스토피아 콘텐츠의 함몰이 자칫 사회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일정 수준의 경계심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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