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새 정부가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 개선 방침을 밝히면서 경제계가 경영 책임자의 정의 등 구체적 방안을 건의했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회원사와 주요 기업의 의견을 수렴해 '실효성 제고를 위한 중대재해처벌법 건의서'를 이날 고용노동부에 전달했다.
이번 건의서에서 전경련은 △중대산업재해 정의 △중대시민재해 정의 △경영 책임자 등 정의 △경영 책임자 등 안전보건 확보 의무 △도급 등 관계에서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 △안전보건 교육의 수강 △종사자의 의무 △경영 책임자 등 처벌 △손해배상의 책임 등 총 9가지에 대해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전경련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경영 책임자등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을 꼽았고, 특히 처벌 대상을 경영 책임자 등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다수가 한꺼번에 처벌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시행령상에서라도 중대재해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최고안전책임자(CSO)를 경영 책임자 등으로 볼 수 있게 명확히 규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안전보건에 관해 인력, 예산 등의 최종 권한을 가진 CSO가 있을 경우 대표이사 책임이 면책 가능한 지 묻는 기업이 많지만, 전문가의 의견은 각기 다르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이 강력한 형벌을 부과하는 만큼 명확성에 대한 요구가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00일을 맞은 지난달 6일 오전 서울 시내 한 건설 현장에서 건설노동자가 작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불명확한 개념, 부작용 우려…추상적 표현 삭제해야"
또 전경련은 중대산업재해와 중대시민재해에 대한 정의도 합리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대재해처벌법 2조 2호·3호는 중대산업재해 부상자에 대해 '6개월 이상 치료 필요, 2명 이상', 질병자에 대해 '1년 이내 3명 이상'으로, 중대시민재해 부상자에 대해 '2개월 이상 치료 필요, 10명 이상', 질병자에 대해 '3개월 이상 치료 필요, 10명 이상'으로 각각 규정하고 있다.
전경련은 "중대시민재해 질병자 규정에서도 3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경우로 한정했고, 부상자 규정도 치료 기간을 반영하고 있다"면서 "중대산업재해의 질병자에 대해서만 중증도 기준이 없는데, 이는 규정 간 균형성과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전경련은 법률과 시행령상 불명확한 개념이 법 집행 과정에서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시행령상 '필요한', '충실히', '충실하게' 등 추상적인 표현을 삭제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안전·보건을 위한 관리 비용에 관한 기준'이 무엇인지 명시돼 있지 않고, '안전·보건 관계 법령'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할 수 없어 자의적 해석 여지가 높다는 의견을 냈다.
전경련은 주요 국가보다 사업주에 대한 처벌 수준이 과도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처벌과 병과하는 이중 제재란 이유로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경련은 하한형으로 부과한 처벌을 상한형 방식으로 바꾸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폐지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1명 이상 사망자가 발생하면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이와 비교해 미국은 안전 규정을 고의로 위반해 근로자가 사망하면 6개월 미만 징역, 독일은 고의·반복적으로 안전 규정을 위반해 근로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 징역 1년 이하 등으로 처벌하고 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기업들도 산업 현장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산업 현장의 혼란을 줄이고 재해 예방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사후 처벌보다 사전 예방이란 산업 안전보건 정책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새정부 경제 정책 방향 관련 합동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경총 "중대재해 예방 핵심은 실효성 높은 체계 구축"
이와 관련해 경제계에서는 산재 감소 효과를 위해서는 규제 등에 대해 주요 선진국의 방식을 참고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19일 '주요 선진국 사례로 본 우리나라 산재 예방 행정 운영 체계의 문제점 및 개편 방향'이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각국의 △산업 안전보건 규제 방식 △산재 예방 행정 조직과 정책 결정 구조 △행정 조직 운영(감독) 방식 △행정 조직의 인적 역량 강화 방안 △산업 안전보건 주요 전략 등 5개 분야를 비교·분석했다.
보고서는 이에 대해 "주요 선진국은 기업 자율의 책임 관리와 산업별 특성에 적합한 법령 체계를 구축해 사업장의 자주적 안전 관리를 유도하지만, 한국은 업종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법령 체계와 지시·명령 위주의 획일적 규제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 규제 수준 대비 산재 예방 효과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또 "주요 선진국은 일원화된 산재 예방 조직 체계를 갖춰 효율적으로 산재 예방 사업을 수행하고, 예방 정책 수립·결정 시 기업 등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나, 한국은 산재 예방 기관인 고용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업무와 기능이 중복돼 예방 정책과 사업의 실효성이 낮고 정부 주도로 산재 예방 정책 대부분이 결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본부장은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통해 선진국보다 강한 규제와 처벌 법규를 도입한 국가가 됐지만, 여전히 산재 감소 효과가 미미하다"며 "중대재해 예방의 핵심은 처벌만능주의가 아닌 실효성 높은 산재 예방 행정 체계의 구축과 운영에 있으므로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선진국형 예방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지난 16일 '새 정부 경제 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 다음 달부터 경영 책임자 의무 명확화를 위한 시행령 개정 등 재해 예방 실효성 제고와 현장 애로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마련, 처벌 규정·작업 중지 등 현장 애로와 법리적 문제점 등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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