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2일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 백스테이지. 흡사 비에 젖은 듯 땀 한 바가지 흘린 넬 네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정재원(드럼)이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영상과 조명, 무대 위의 모든 것은 음악과 시너지를 내는 형태로 나아가야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 그 아이디어가 반짝여야 하지요.”(김종완)
“공연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를 직접 짠다”는 이들의 실험적 항해가 새 항구에 다다랐다.
장대한 수평선과 투명하게 부서지는 물결, 규칙적 사이클로 원을 그리다 무대 위 발밑까지 삼킬 듯 다가오는 파도의 입체감...
‘화이트 큐브’를 연상시키는 세 백색 평면 공간에 바닥까지 투사되는 빔과 레이저는 무대를 미술관으로 바꿔 놨다. 뿌옇고 아련한 느낌의 영상, 그 뒤로 겹쳐지는 진한 음(音)의 페이소스.
지난 3일(12월31일~1월2일) 간 이곳에서 열린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은 지금 시대의 시무룩한 자화상을 어쩌면 더 깊게 마주봄으로써, 내면의 정화와 조우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연출들이 특기 할만 했다.
지난 3일(12월31일~1월2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넬의 공연은 사운드와 무대 조명, 감각적 영상, 연출로 정평이 난지 오래다. 특히 매년 크리스마스에 열리는 ‘CHRISTMAS IN NELL'S ROOM(넬스룸)’은 2003년부터 이어져온 이들 대표 브랜드 공연이다. 조향까지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한 기획력은 한국 대중음악 공연 문화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도 크리스마스에 맞춰 진행하려 했으나, 연말 코로나 확산세가 커지면서 미뤄졌고 그 마저 긴장 모드 하에 진행됐다. 300명을 초과하는 행사(비정규공연장, 스포츠대회, 축제 한정)의 경우 원칙적으로 금지되며 관계 부처 사전 승인 하에 예외적으로 4000명 이하로 개최가 가능한 상황이어서다. 올해 역시 조향 등 기획과 관객들 함성이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멤버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들로 난관을 타개해 갔다.
‘Seventh tree’. 대기 중 공연장에 깔리던 앨범은 골드프랩(Goldfrapp)의 2008년작이었다. 그래미 후보까지 오르고 나서 앰비언트 음악으로 ‘자연주의’를 그렸던 영국 일렉트로닉 듀오의 실험작. 몽환적인 다운 템포 멜로디가 거대 스피커를 타고 홀 내 안개 같은 자욱한 감성을 시종 드리우다가, 저녁 7시 정각 이 분위기를 자연스레 이은 무대가 펼쳐졌다.
도입부를 길게 늘어뜨린 ‘Sunshine’ 편곡 사운드는 역대 넬의 오프닝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 빈티지 건반 음으로 시작해 영롱한 기타 아르페지오, 신디사이저가 겹쳐지며 차오르는 크레센도가 거대 파이프오르간이 움직이는 신성한 제단 같은 기운을 장내에 불어넣었다.
둘째 곡 ‘Slow motion’ 때부터는 ‘ㄷ’자를 90도 우측으로 회전한 세 백색 평면 공간의 골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바닥부터 대각선으로 서서히 쓸어 올리는 실루엣 연출 사이로 슬로우템포 건반과 스네어, 톰의 리듬 새김이 잔잔한 울림의 공명을 일으켰다.
이들의 공연은 귀로만 듣던 음의 세계를 시각으로,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려 노력하고 마침내 도달하고야 마는 캔버스 같다.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상상하게 하는 기하학적 문양들은(‘A to Z’), 심장 고동 같은 전자드럼 패드의 울림에 맞춰 각진 주상절리로 변하고, “영화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그런 이별 난 할 줄 몰라요” 할 때 발화하듯 흩어졌다.(‘Down’)
지난 3일(12월31일~1월2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사운드스케이프 측면에서는 줄곧 추상적이고도 우주처럼 공간이 넓은 느낌을 구현하려고 해왔다. 가상악기와 리얼악기(베이스, 기타, 드럼)가 최상의 균형을 찾아가는 모던록 풍 곡들을 입체적 영상으로 표현할 때 특히나 숨죽여 빠져들만 했다.
공중에 달린 빔 프로젝트는 이들이 딛고 선 발밑까지 파도를 일렁이고(‘위로’), 파스텔 톤 구름들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겹쳐낼 땐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이 절로 연상됐다.(‘유희’, ‘말해줘요’)
공연의 최대 백미이자 전환점은 중반부 ‘Boy-X’ 때부터였다. 천장에 가려져 있던 조명 트러스트가 서서히 분리를 시작하며 수백개의 레이저 빛을 무대 아래 쏘아 올렸다. 주로 차분한 질감의 사운드가 주도하던 공연은 이때부터 반전됐다. ‘Glow in the dark’, ‘All this fxxking time’, ‘Ocean of light’.... 좌우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오는 전기 기타 멜로디의 장대한 융단은 둔탁하게 꿈틀대는 베이스, 드럼과 뒤섞이며 질주를 시작했다.
‘Full moon’에서는 ‘Get high 'till you kiss the satellite(위성에 키스를 할 때까지 높이 오르자)’라는 가사에 맞춰 트러스트가 다시 위 아래로 반전되며 우주선 같은 모형을 그려냈다. 공연이 끝나고 보컬 김종완은 기자와의 대화 중 “키네시스(Kinesys) 모터 기술을 활용한 조명 장비”라며 “실제로 곡에 맞춰 장비의 동선 연출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접 본 메탈리카, 디페쉬 모드 공연 같이 ‘온 몸에 전율이 일던 경험’을 추구한다. “공연과 음반 작업은 성격이 달라요. 음반은 우리 마음에 들 때까지 시도할 수 있지만, 공연은 단 한 번의 순간으로 끝나버리니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관객들 기대에 못 미치면 안 되니까, 늘 새로운 시도를 해야하기도 하죠.”(김종완)
밴드의 23년 노하우가 집약된 만큼 공연에는 ‘기승전결’ 식의 흐름이 있었다. 초반 잔잔한 건반 울림으로 시작한 공연은 차츰 소리를 쌓다 증폭되고, 다시 또 차분한 순간을 만들어가고 하는 식의 전개로 이어졌다. 서태지, 잠비나이, 혁오 등을 비롯해 넬의 공연과 녹음 사운드를 오래 담당해온 ‘몰스튜디오’ 스탭들이 음향 중심을 잡아줬다.
또 다른 공연의 특이점은 요즘의 다른 공연들처럼 떼창(제창) 구간을 별도의 녹음소리로 대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억을 걷는 시간’과 같은 대표곡들 순서 때 다 같이 불러야 하는 부분을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공(空)의 여운, 미학이 느껴지게 했다.
“최근 세계 최대 망원경(‘제임스웹’)이 우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지 않습니까. 과학은 이렇게나 발전하는데 우리의 시간은 단 1초도 돌릴 수 없으니까요. 코로나로 지난 2년이 훌쩍 흘러간 게 너무 씁쓸하지만, 2022년도 열심히 해봐야죠. 공연이 끝나면 여러분들이 직접 보내준 녹음 함성으로 영상을 제작할까 해요. 그것도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어서.”(김종완)
지난 3일(12월31일~1월2일) 간 서울 송파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굿바이, 헬로 인 넬스룸(Goodbye, Hello’ in NELL’S ROOM)’.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공연의 대단원인 ‘12 seconds’. 종이책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화자는 일렁인다. ‘노을 지는 마음/ 파도치는 마음’ 여리지만 탄탄한 팔세토 가성은 천상과 연결된 듯 이내 파란 음향의 구름을 뚫고 비상한다. 암전, 이내 동시 켜지는 수백개 백색 조명과 수천개의 종이비...
장엄한 현악과 휘몰아치는 록 사운드 원경에 어떤 외침이 끼어든다. 흩날리고 명멸하는 그것은, 어쩌면 지독한 감염을 뚫고 피어난 천상의 바다다.
절단 난 관계, 슬프고도 아픈 마음, 그러나 톡톡 찌르는 이 마음을 오히려 건듦으로써 일어나는 벅찬 정화의 물결, 새로운 생을 향한 위태롭지만 부단한 날개짓...
‘Don't break my heart... You broke my heart. (Why did you have to go) Yes, broke my heart.’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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