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 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어떤 이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연주자들은 8비트 픽셀 아트처럼 늘어지며 연결된다. 자가 복제를 하기도 하고, 거인처럼 커지기도 한다.
대각선으로 뉘여 코르그를 연주하는 건반연주자 뒤로는 거대해진 드럼 키트의 라이드 심벌이 겹쳐진다. 난쟁이처럼 작아진 트럼펫 연주자는 연체동물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는 춤사위와 맞물린다.
색소폰과 트럼펫이 깔아둔 사운드를 ‘주단’ 삼아 미끄러지는 경쾌한 전통 가락. 솔, 펑크(Funk)의 ‘그루브’, 트롯 ‘뽕끼’가 경기민요와 뒤섞여 이루는 ‘난장’ 세례….
‘국악계 이단아’라 불리는 소리꾼 이희문이 최근 다시금 내놓은 회심의 ‘역작’(OBSG '허송세월말어라' 뮤직비디오)이다.
연주자들이 자가복제되며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OBSG의 '허송세월말어라' 영상. 사진/이원아트팩토리
코로나19 장기화에 맞서고자 그는 최근 문화예술계 각 분야 전문가들과 의기 투합했다. 전통소리를 외국 사운드에 비벼낸, 기존 이희문의 음악을 재해석하는 ‘Not Alone’ 프로젝트. 지난 5일 공개된 '허송세월말어라'를 시작으로 '방물가'(12일), '출인가'(19일)까지 ‘파격미’의 영상 작품이 차례로 이어져오고 있다.
지난 14일 ‘녹색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이희문과 화상으로 만났다. 그는 코로나19와 관련 “문화예술계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 어떻냐”는 질문에 어느 TV 프로그램명을 꺼내 들며 재치 있게 응수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래요. ‘놀면 뭐하니?’죠.”
“공연을 간간히 하고는 있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쉽지는 않다”는 그는 “음반 작업 외에 다른 재밌는 것을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 하다가 주변 예술인들과 뭉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코로나 여파에 의도치 않게 정규 앨범을 두 장이나 낸 그다. 허송세월 & 놈놈과 함께 한 프로젝트 ‘OBSG’로 1집 ‘오방神과’를, 재즈 밴드 프렐류드와의 협업 프로젝트 ‘한국남자’ 2집을 발표했다. 코로나로 공연활동이 신통치 않자, 지난해 10월부터 함께 앨범 준비를 했던 우상희 포토그래퍼, 강말금 배우를 비롯해 헤어·의상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과 다시 뭉쳐보기로 했다.
경기잡가와 재즈 프로젝트인 '한국남자' 2집에 수록된 '방물가'의 촬영 장면. <춘향전> 두 주인공의 가슴 아픈 이별을 그린 가사를 강조하기 위해 이희문 자신이 직접 춘향과 몽룡으로 분하고 그래픽아트와 함께 표현해냈다. 2.35:1의 씨네마스코프 영상비를 채택, 전위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를 통해 익숙했던 춘향전의 내용을 낯설게 보이도록 한다. 사진/이원아트팩토리
“관객을 모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상 매체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보자는데 의기투합했죠. 저라는 뮤지션의 음악이 제 3자의 시선으로 재해석되면 어떨까도 궁금했어요.”
코로나 시대 ‘예술의 초격차’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기술을 활용한 소통과 연대의 힘으로 기발한 창의, 비빔밥 같은 혼합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오는 26일에는 마지막 곡 ‘어랑브루지‘의 영상 공개를 앞두고 있다. ‘글램록과 스페이스록의 선구자’ 데이비드 보위(1947~2016)를 연상시키는 분장부터 아찔하다. 함경도 민요 ‘어랑타령’을 블루지한 재즈로 재해석한, 이 기묘한 음악 세계를 다차원 우주로 쏘아 올린다.
26일 공개될 '글램록'의 선구자 데이비드 보위를 연상시키는 '어랑브루지' 뮤직비디오'. 사진/이원아트팩토리
기묘한 이들의 영상 세계는 최근 국악을 결합시킨 대중적 대안음악의 트렌드와도 맞닿아있다. 지난해 유튜브를 통해 세계를 휩쓸었던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고래야의 NPR '타이니 데스크’ 영상 등이 대표적.
퓨전국악그룹 씽씽 출신인 이희문 역시 2017년 아시아 가수 최초로, NPR '타이니 데스크’ 무대에 서본 전례가 있다. “쇼킹한 비주얼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해외 시장으로 더 나아가려면 음악적인 차별성도 중요하다고 봐요. 이를 테면, 영미권에선 시도하지 못하는 시김새(국악에서의 꾸밈음) 같은 것.”
통상 3박을 주로 쓰는 국악을 4박이 주가 되는 대중음악에 맞추려면 ‘시김새’ 등 음악적 본질이 흐려질 수 있지만, 그는 “훈련을 통해 최대한 전통 테크닉을 지켜내는 것이 한국 음악 고유의 매력을 해외 시장에 더 알릴 수 있는 비결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14일 화상으로 만난 이희문.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올해 4월까지 삼성동 마리아칼라스 홀에서는 ‘한국남자’의 소규모 공연을 진행할 계획이다. 50명 석 규모 공연장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17석까지가 최대지만 “잡가의 즉흥성을 알리고 싶다”는 의지로 이어간다. OBSG의 경우 ‘Not Alone’처럼 새로운 영상 프로젝트도 준비해볼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사태로 의도치 않게 태생한 이번 프로젝트를 여행지에 빗대달라니 “정선”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완전한 ‘청정 지역’이거든요. 굽이굽이 산도 있고 공기도 맑고 사람 인심도 좋고. 하루 빨리 코로나 전의 세상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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