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태의 경제편편)삼성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2020-08-19 06:00:00 2020-08-19 06:00:00
지난 12일 삼성화재는 인사팀 상무와 노조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삼성화재는 이번 단체협약을 통해 노조 전임자를 인정하고 노조 사무실도 제공하기로 했다. 오상훈 노조위원장이 이날 밝힌 대로 삼성화재 노동자의 권익을 노조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나갈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도 지난달 27일 "정당한 노조활동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노조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 조치로서 충남 아산 사업장에 노조사무실을 마련하고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전임자 2명의 활동도 인정하기로 했다. 이 회사에서도 앞으로 노사 단체교섭을 진행하는 등 새로운 풍속도가 그려질 전망이다.
 
확실히 삼성은 요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전에 걸어보지 않았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은 1938년 창립 이후 '무노조 경영'이라는 원칙 아닌 원칙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삼성에서 노조를 세워보려는 시도는 간단없이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측의 완강한 자세로 말미암아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최근 일부 경영진이 재판에 넘겨지고, 해고된 노동자에 뒤늦게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5월 그룹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면서 '무노조 원칙 포기'를 선언했다. 더 이상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노사 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삼성으로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같은 선언이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노조가 생겨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이미 노조가 설립된 다른 재벌의 경우를 살펴볼 때 노조의 역할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분식회계나 총수 일가의 일감몰아주기 등을 노조가 막아내기 어렵다.
 
더욱이 기업경영에서 노조만이 유일한 이해관계자라고 할 수도 없다. 채권자와 주주, 협력업체, 대리점 등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는 다양하다. 소비자나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심지어 노조가 법적으로 허용된 정당한 쟁의행위를 하는 데도 소비자단체나 협력업체 등에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같은 국가기관이나 회계사 등 전문가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많은 경쟁기업이 노려보고 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무대라고 할 수 있는 국내외 경쟁무대에서 경쟁력도 높여야 한다. 때문에 노조의 비중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
 
그렇지만 노조의 존재가치가 과소평가되거나 폄하될 수는 없다. 노조만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 예컨대 사업장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안전사고 방지를 위한 노조의 역할은 지대하다. 노조가 경영진을 견제하고 비판하면서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고 노동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안전사고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기업경쟁력과 이미지를 지키는 데도 유익하다. 협력업체와 하청노동자에 대한 처우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사회책임투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협력업체나 하청노동자에 대한 부당대우나 갑질 등이 벌어지면 국내외에서 신인도를 저하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대기업 노조가 이런 문제에 대해 경영진에게 할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유익한 일임을 깨우쳐줘야 한다. 새로운 경영정신을 갖추고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과제는 삼성그룹 계열사 노조만 안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대기업 노조가 직면한 숙제다. 삼성그룹은 국내 최대의 재벌이기에 특히 더 중요하다.
 
삼성 계열사 가운데 삼성화재와 삼성디스플레이 외에도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에스원 등 일부 계열사에도 노조가 이미 설립됐다. 앞으로 다른 계열사에도 더 생겨날 것이다. 이들 노조와 경영진이 함께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영의 전범을 만들어나가길 기대한다.
 
사족을 하나 달아야겠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귀찮은 일이 아무래도 많아질 것이다. 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되면 공시 등 여러 가지 부대업무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한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다. 따라서 그런 귀찮은 일 하기 싫다고 무를 수도 없다. 단테가 연옥으로 들어간 후 돌아나올 수 없었던 것처럼, 노조가 없었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노조 없던 시절에 대한 미련은 이제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맞춰 '화합경영'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차기태 언론인 (folium@nate.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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