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거대한 체스판’과 한국의 길
2026-03-10 15:40:30 2026-03-10 19:37:18
트럼프 행정부의 전격적인 이란 공습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미 패권의 구조적 위기와 그 속에서 한국이 처한 위험한 의존 상태를 드러내는 징후다. 무엇보다 테헤란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독점해 온 미국의 통제력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미 정치외교학의 거물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며 세계 패권의 핵심 무대인 유라시아의 ‘다원성(pluralism)’을 관리하는 것이 미국 패권 유지의 핵심 과제라고 했다. 그가 특히 경계한 것은 러시아·중국·이란과 같은 세력이 반미 연합으로 결집해,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외부 세력’으로 고립되는 시나리오였다. 미국이 이 지역 국가들 간의 균형을 조정하고, 갈등을 관리하며, 특정 국가가 ‘지정학적 추축’으로 부상해 반미 세력을 결집시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개입해야 한다고 한 이유였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공격은 바로 이 오래된 패권 전략의 연장선 위에 놓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전략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나아가 트럼프의 행보는 브레진스키가 경고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자초하고 있다. 이란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이란을 중국과 러시아의 품으로 완전히 밀어 넣었으며, 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질식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당장 중국과 러시아가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새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이란을 군사적으로 두들겨 제압할수록 러시아와 중국, 나아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미국을 ‘불안정의 원천’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란 공격의 군사적 위력 뒤에는 더 이상 세계를 설득하지 못하고 폭력으로만 질서를 연장하려는 노쇠한 패권의 초상이 어른거린다. 힘을 과시하는 순간, 그 힘의 한계 또한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다.
 
아울러 현재 미국은 1990년대 브레진스키가 구상하던 ‘자신감 있는 유일 패권국’과도 거리가 멀다.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와 인공지능(AI) 거품 붕괴 우려, 양극화와 인종 갈등, 국내 정치의 극단적 분열이라는 내부적 진통마저 겪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가 그 균열을 관리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키는 독재자에 가깝다는 점이다. 결국 이번 이란 공격은 쇠락해 가는 제국이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적으로 돌려 모면하려는 마지막 단말마적 비명인 셈이다. 도덕적 정당성을 잃은 군사력은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세계를 불확실성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파괴적 변수일 뿐이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7일(현지시각) 이란 테헤란의 석유 저장 시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미 제국의 황혼이 짙어지는 시대에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오직 미국이라는 단일 축에만 의존할 순 없다는 점이 거듭 자명해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동맹의 가치마저 매몰시키는 상황에서, 한국은 이제 독자 생존 전략과 다자적 외교 지평을 열어야 한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김종대 전 의원이 말한 것처럼, 지난해 10월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했던 ‘다자 협력과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지속 가능한 내일은 대립이 아닌 연결과 혁신을 통해 가능하다"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 공동체 실현을 주창했다. 이는 단순히 선언적인 외교 수사가 아니라, 미·중 패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지침이다.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들이 요동치고, 오만한 제국이 낡은 권위를 휘두르는 격변의 시대다. 한국은 이제 종속적 동맹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자주의의 기치를 들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설계하는 주도적 행위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경주가 세계에 약속했던 미래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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