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절벽의 곡예사 산양
2026-01-16 11:49:42 2026-01-16 11:49:42
산양이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에서 눈을 헤치고 풀을 먹고 있다.
 
해발 600~1200m의 험준한 암벽 지대를 가볍게 오르내리는 '절벽의 곡예사'가 있습니다. 멸종위기종이자 국가자연유산 217호인 산양(Naemorhedus caudatus)입니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산악 포유류인 산양은 중형 발굽동물로, 약 200만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름에 '양'이 들어가지만 분류학적으로는 소과에 속하며, 우리가 떠올리는 면양보다는 흑염소와 더 가까운 친척입니다. 몸길이 82~130㎝, 체중 22~35㎏ 정도이고, 암수 모두 뒤로 굽은 원통형 뿔을 가진 것이 특징입니다.
 
산양은 사슴처럼 뿔이 해마다 빠지는 것이 아니라 뿔이 평생 자라기 때문에 뿔크기로 나이를 가늠합니다. 가파른 절벽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산양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충격을 덜 받도록 굵고 단단한 다리와 바위에 달라붙듯 미끄럼에 강하고 탄력 있는 발바닥으로 암벽 위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적갈색의 보호색 덕분에 멀리서 보면 바위와 경계가 흐려져 눈밭이 아니라면 육안으로 산양을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저는 남북이 첨예하게 맞서는 동해 최북단, 건봉산에서 산양을 처음 만났습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이 활약했던 건봉사를 지나 오소동 계곡을 넘어가면, 북녘의 금강산 비로봉이 어렴풋이 보이는 철책선이 나타납니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도로와 철도는 흰 눈에 덮여 흔적만 남아 있고, 감시 카메라만 을씨년스럽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긴장감이 감도는 초소 인근 내륙 쪽에서 뜻밖에도 산양이 종종 모습을 드러냅니다. 겨울철 굶주림에 시달리던 산양에게 병사들이 먹이를 나눠주던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분단의 풍경 한가운데서, 생명을 잇게 한 작은 손길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멸종위기종 산양이 강원 고성군 건봉산 자락을 내려오고 있다.
 
1970년대까지도 산양은 강원·충북·경북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비교적 흔하게 관찰됐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가 속도를 내면서 서식지는 조각났고, 밀렵까지 겹치며 개체수는 급격히 줄었습니다. 현재 한반도에 남은 산양의 개체수는 2000마리 미만으로 추정되며 주요 분포는 건봉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월악산 등 백두대간 생태축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한편 최근에는 복원 노력의 성과로 경북 경주 남산권까지 서식 범위가 이동하며 생태축이 다시 연결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도 있습니다.
 
반면 산양의 서식지가 단편화되면서 집단 간 이동과 교류가 제한되고, 그 결과 유전적 다양성이 취약해지는 위험도 커졌습니다. 여기에 기후 위기가 더해지면서 상황은 한층 가혹해집니다. 폭설은 산양의 먹이 접근을 어렵게 하고, 체력 소모를 가중시킵니다. 1960년대 극심한 눈으로 산양 수천 마리가 폐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2023년 겨울부터 2024년 봄 사이 강원도 일대에서 약 1022마리의 산양이 집단 폐사하는 비극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한국 내 산양 개체수의 절반이 사라졌다는 평가까지 나올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원인은 폭설과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차단 울타리로 인해 발생한 복합 재난이었습니다. 기록적인 눈으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양들이 낮은 지대로 내려오려 했지만, 멧돼지 이동을 막기 위해 설치한 철망에 가로막혀 탈진 하거나 아사한 것입니다. 당시 구조된 산양들은 정상 체중의 60%도 되지 않는 15~18㎏였다고 하니, 폭설의 여파가 산양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024~2025년 겨울부터는 다행히 환경부가 주요 구간의 울타리를 부분 개방하고, 폭설이 내릴 때마다 먹이를 공급하면서 폐사 개체수가 평년 수준인 30여마리로 줄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 조치는 어디까지나 급한 불을 끄는 대응에 가깝습니다. 매년 폭설이 반복 된다면 울타리와 단절된 서식지라는 구조적 문제는 언제든 다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산양 보전의 다음 단계는 단순한 개체수 회복을 넘어 고립된 서식지의 연결성을 되돌리는 일로 확장 돼야 합니다. 산양 복원 사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도 개체군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서식지 단절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 입니다. 예컨대 1990년대 10여마리로 시작한 월악산 산양은 현재 100마리 이상으로 늘었는데, 설악산 등 타 지역의 산양과 합사, 관리로 유전적 건강성을 보완해 온 결과 입니다. 이런 성과가 꾸준히 이어지기 위해서는 폭설이나 먹이부족 등 환경조건이 바뀔 때 먹이를 찾는 산양이 안전하게 이동할 길이 보장돼야 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태 통로입니다. 방역과 안전을 위한 인위적 구조물이 의도치 않게 야생동물의 생존권을 위협하지 않도록, 더 세밀한 설계와 공존 전략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산양의 발자국이 이어지는 산은 건강한 생태계의 징표입니다. 햐얀 눈이 산을 덮을 때, 누군가에게는 낭만이지만 산양에게는 죽음의 장막일 수 있습니다. 200만년을 버텨온 강인한 발굽이 인간이 세운 차가운 철망 앞에서 멈추지 않고, 그 단단한 발굽으로 절벽 위의 곡예를 펼칠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과 선택이 필요합니다.
 
글·사진=김연수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wildik02@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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