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5월이었다. 필자가 한 방송사 시사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진행자 겸 보도책임자 시절이었다. 대개 5·18 기획을 내보내는 시기인데, 그때는 아주 특별한 보도를 준비했다. 1980년 5월에 처형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둘러싼 스토리 기획이었다. 누군가에겐 질투심에 방아쇠를 당긴 광인, 또 누군가에겐 유신독재의 심장을 쏜 영웅으로 평가받는 김재규. 근현대사에서 그만한 논쟁적 인물은 찾기 힘들다.
당시 제작진은 대통령 저격을 둘러싼 역사적 평가보다는 수사와 재판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에게 적용된 '내란목적살인죄'라는 죄목은 합당했을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고문이나 강압은 없었을까. 석 달 가까이 관련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김재규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필자에게 “수사는 고문으로 점철됐고 재판은 정의를 잃었다”고 했다. 강 변호사는 인터뷰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김재규와 그 부하의 사진 200 여 장을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보도가 화제가 된 점은 김재규 재판의 녹음 테이프를 입수해 공개한 부분이었다. <스포트라이트> 소속이던 봉지욱 기자가 발굴한 내용이었다. 그날의 재판부는 재판 내용을 녹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녹음했을까. 테이프 분량이 120여 시간인 데다 잡음도 많이 섞여 있어 독해하는데 애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날, 똘똘한 담당 작가가 관계자의 대화 말고도 수상한 소리가 무수히 섞여 있다고 보고해 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김재규 말이 잘 녹음이 안 돼. 마이크 접촉 불량…”
“야, 최 일병! 최 일병!”
군 관련 인물들이 몰래 녹음한 것 같은 정황이 잡음 형태로 잡혔다. “법정 뒷방에 보안사 관계자와 검사 등이 모여 있었다”, “뒷방에서 나온 쪽지가 재판부에 전달됐다”는 당시 변호인들의 증언과 맞춰보며, 제작진은 수상한 잡음의 정체를 규명해 나갔다. 결국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신군부가 재판에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물증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녹음 테이프에는 김재규 부장이 범행 동기를 자세히 증언하자, ‘잡음’이 이렇게 반응하는 대목도 나온다.
“영웅이네 영웅… 저거 넣으면 안 되는데…”
제작진은 남아 있는 공식 조서와 테이프 녹음 내용을 비교해봤다. 녹음 테이프에서 김재규 부장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내란 목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개인 행동이었다고 반복해 주장한다. 김재규 부하들은 흉기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고도 증언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런 내용의 적지 않은 부분이 공식 조서에는 빠져 있었다. <스포트라이트> 보도를 계기로 유족 대표가 재심을 청구했고, 4년간의 숙고 끝에 얼마 전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재심 결정문에는 김재규 부장이 직접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 이유 보충서의 일부 내용이 인용돼 있다.
‘새벽 보안사의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은 본인의 전신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심지어 EE8(군용)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 고문까지 자행하였습니다(생략)…’
역시 김재규 부장의 변호인이던 안동일 변호사는 재심 신문에서 “당시 군법회의는 재판이 아닌 개판이었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의 살인이 명백하더라도 사법 절차는 정당하게 진행돼야 한다. 당시 육성 테이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김재규에게 적용된 내란목적살인죄는 정당한가. 역시 육성 테이프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재심 결과는 신군부의 가혹 수사와 재판 개입을 입증하는 데 달려 있다. 44년여 전의 녹음 테이프가 박정희뿐만 아니라 전두환 군부독재라는 ‘내란의 뿌리’를 동시에 심판하는 결정적 단서, 스모킹 건이 될 수 있을까.
이규연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겸 미래학회 회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