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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대선 주자들이 공약과 정책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후보 선호도 부동의 1위인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가 가장 앞서 치고 나가며 실용주의와 중도보수를 표방해 판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념보다 민생을 우선하겠다며 대표적 정책 브랜드인 ‘기본사회’를 보류하고 경제살리기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맞춰 민주당은 삼성전자급 첨단기업 6개를 육성해 성장률을 5년 내 3%대로 끌어올리겠다는 ‘집권플랜’도 발표했습니다.
외연 확장을 위해 ‘민주당은 본시 중도정당’이라며 성장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원하는 ‘주 52시간 근무제’ 완화나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는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업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노란봉투법’을 재발의하여 혼란만 키웁니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이재명 대표의 노선이 국민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그런데 보수와 진보를 오가는 상충적 정책은 역대 정부에서도 무수히 나타났습니다.
보수정권임을 자랑스럽게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는 대학 등록금을 동결하는 무지막지한 조치를 시행해 16년 동안 대학들을 괴롭히며 지식 경쟁력을 훼손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를 간판으로 내세워 집권했고 김영란법과 같은 규제를 만들어 서민경제를 옥죄었습니다. MB정부 시즌2라는 윤석렬 정부에서는 ‘상생금융’이라는 명분으로 은행이 취약차주의 대출이자를 탕감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자칭 보수정부에서 반보수적 정책을 자행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진보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하면서 행정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등을 개발해 전국을 투기 열풍으로 몰아 부동산 가격을 올렸습니다. 이 당시에도 진보정부가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는 조롱을 받았습니다. 경제적 약자를 위한다는 문재인 정부도 부동산 가격과 최저 임금을 올려 애꿎은 서민과 소상공인만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정치인들이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가치를 이해하고 구분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념적으로 진보 또는 보수를 표방하지만,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섞어 사용합니다. 이재명 대표가 “시대 상황이 진보성이 중요할 땐 진보적 중도역할이, 보수성이 중요할 때는 중도보수 역할이 더 컸다”라고 주장한 말이 딱 맞습니다.
우리나라 정당과 정부가 이념적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정책을 선택하는 이유는 정치공학과 포퓰리즘에 사로잡혀 오락가락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변화나 여론의 흐름에 흔들려 근시안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일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선진국처럼 이념적 가치를 토대로 국가 백년대계를 연구해 정책의 중심을 잡아주는 싱크탱크(Think Tank)가 없다는 것도 한가지 원인입니다.
싱크탱크는 정책 분석과 연구를 수행하여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이를 정부, 의회, 언론 등에 전파하는 독립적 연구기관을 말합니다. 경제주간지 포브스(Forbes)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싱크탱크는 약 8천 개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됩니다. 미국이 가장 많은 1,872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 512개, 영국 444개로 나타납니다.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DC에 소재한 싱크탱크만 400개에 이릅니다.
미국의 싱크탱크는 정치권과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헤리티지재단, 브루킹스연구소, 허드슨연구소, 랜드연구소,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등의 싱크탱크는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합니다.
트럼프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부르짖으며 좌충우돌하고 전임 바이든 정부가 한 약속을 어기며 동맹들과의 관계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치밀한 연구에서 나온 미국의 이익 극대화 전략의 일환입니다. 이런 전략을 연구하고 정책으로 구상하여 정치권에 제공하는 싱크탱크를 미국 힘의 원천으로 꼽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때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같은 국책연구원이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 바람을 타며 정권에 편승한 탓에 정책개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현재 국책연구원의 수장은 대부분 대선 캠프 출신이나 대통령실에서 일한 사람이 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을 주창하고 청와대에서 경제수석을 역임한 교수가 KDI 원장에 부임하였으니 그 정책에 반하는 연구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노동연구원의 어느 박사는 통계자료를 정부의 입맛대로 가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계청장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원장들도 새 정부의 인사들로 다 교체됩니다. 이런 국책연구원에게서 어떤 국가 백년대계의 연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민간연구원도 정부 눈치 보느라 정부 정책과 반하는 연구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과거에 삼성경제연구소가 정부의 예상치보다 낮은 경제성장을 전망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정책 연구를 포기하고 내부 컨설팅에만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계 경제대국 10위인 나라에 정부의 영향력이나 정치 바람을 타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싱크탱크 하나 없다니 말입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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