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입틀막’과 대통령 기자회견 추억
2024-04-08 06:00:00 2024-04-08 06:00:00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하거나 초대받은 행사에 참석한 야당 국회의원과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졸업생이 즉석에서 의견을 주장하다가 경호원한테 입을 틀어막힌 채 들려 나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입틀막’ 소동을 접하고, 대통령 행사 취재에 얽힌 옛 기억이 떠올랐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에 나는 청와대 출입 기자로 일했다. 대통령 기자회견을 하려면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출입 기자 가운데 질문할 사람 숫자와 순번을 정해주는 관행이 당시에 있었다. 텔레비전 생중계를 보면 기자들이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하고 사회자나 대통령이 발언자를 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청와대와 출입 기자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했던 셈이다.
 
질문자를 정하다 보면 홍보 참모들이 질문 주제와 방향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참모들이 예상 질문과 모범 답변 자료를 만들어 대통령한테 미리 보고할 수 있으니 청와대 차원에서 얼마나 안전하며 편리하겠는가.
 
미국 언론계에는 ‘백악관의 전설’이 있다. 유피아이(UPI) 통신 여성 언론인 헬렌 토머스(1920~2013)는 50년 동안 미국 백악관을 출입하면서 존 에프 케네디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모두 10명의 대통령한테 거칠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퍼부은 것으로 유명했다. 백악관 브리핑룸 첫째 줄에 늘 앉았던 그는 『백악관의 첫째 줄』(Front row at the White House)이란 저서에서,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 기자들이 청와대 요구에 협조한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2003년 어느 봄날 노무현 대통령이 오전 오후 두 차례나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인선을 둘러싸고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자 대통령이 오전에 기자회견을 했는데, 취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점심 직후에 기자회견을 한 차례 더 열겠다고 했다.
 
홍보수석실 사람들은 오전 기자회견 때 물론 그렇게 했고, 오후 기자회견을 위해서도 부랴부랴 질문 기자 순번을 정해주고 회견 막을 열었다. 나는 오전이든 오후든 그날 순번에 들어있지 않았다. 대통령이 순번에 들었던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마이크 앞을 떠나 퇴장할 때,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대통령님. 저도 질문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즉석에서 외치는 취재를 기자들은 ‘샤우팅(shouting)’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겨레 박창식 기자. 뭔가요?”라고 하더니, 마이크 앞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국방송공사 사장 인선의 문제점을 질문했고 대통령은 본인 생각을 답변했다. 다른 기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저도요” “저도요”라고 앞다퉈 손을 들었고 대통령은 그 질문을 모두 받아줬다. 질문자를 미리 정하고 약속 대련처럼 진행하던 그릇된 회견 관행이 베를린 장벽처럼 한순간에 무너졌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는 그 뒤 홍보 참모와 기자들이 기자회견 순번을 논의하지 않았다.
 
학생과 사회인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에 나는 가끔 이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자 정신을 발휘해 잘못된 관행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고, 으쓱하는 마음도 들어서였다. 요즘 대통령 행사에서 ‘입틀막’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내가 대통령 행사에 참석하거나 취재할 일은 없다. 만에 하나, 비슷한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은 나쁘다.
 
박창식 전 국방홍보원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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