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 박사는 학교에서 자녀가 폭력을 당했을 때, 부모가 그 가해 학생에게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대신 “우리 아이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라”라고 해야 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보통 가해 학생들이 “친구들끼리 장난친 것이다”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진짜’ 친구들 사이에서는 폭력이 허용되느냐고 반문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친밀한 사이가 가진 ‘폭력적 측면’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나뉘는 폭력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내려진 조언일 것이다.
한편 친구가 아니라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학생이 은근한 따돌림, 소위 말해 ‘은따’를 당할 때, 가해자들은 흔히 “안 친한 것일 뿐이다”라고 변명한다. 물론 한 학급에 속해있다고 해서 모두와 살갑게 우정을 쌓아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변명하는 학생조차도 ‘따돌림’과 ‘안 친한 것’ 사이의 차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명확하게 언어화할 수 있어야 윤리적 요구도 가능해진다.
친구란 이유로 정당화되는 폭력, 혹은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폭력은 모두 서로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진정한 친구 사이에서는 정말로 문제 될 법한 폭력이 있을 리 없다. 반면에 친구가 아니라고 해서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이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의외로 친구보다는 멀고 남보다는 가까운 이 관계를 규정할 말이 우리말에는 없다. 한 학급의 학생들은 같은 반 ‘친구’와 그냥 같은 반 ‘애’로 나뉜다. ‘애’라는 말이 연령 이외에 아무 내용도 없는 말임을 고려하면, 학급에는 사실상 ‘친구’ 아니면 ‘남’밖에 없는 셈이다. ‘급우’, ‘학우’, ‘교우’ 같은 말이 있지만 쓰이지 않은 지 오래다. 영어에서는 'classmate'(독일어는 Mitschüler)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 관계를 부를 말도 없는데, 거기에 어떤 윤리가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해 왔을 리 없다. 가끔 ‘선을 넘’더라도 사랑과 배려가 가능한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 고민이 불필요할 수도 있다. 남과 관련해서는 그 고민의 역사가 깊다. 맹자가 말했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은 ‘인간에게 차마 못 할 짓’에 대한 것이며, 오늘날의 인간의 권리들, 즉 인권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남에 대한 윤리의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그런데 적당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함께 해야 할 사람들, 이를테면 같은 학급의 학생들이나 직장 동료 사이에는 어떤 윤리가 필요한가? 친구 사이의 배려는 너무 촘촘하고, 남 사이의 도덕은 너무 성기다. 한 공동체의 윤리는 항상 그 목적이나 관계의 성격 등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
이런 질문은 정치공동체에도 적용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의사결정을 하고 수행해야 하는 공동체에는 어떤 윤리가 필요한가? 비록 우리 헌법에는 ‘시민’이라는 말이 없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바로 그 내용이다. 하지만 권리는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지켜지지 않으며 행동을 통해 실천되어야 한다. 그 실천의 시작은 당연히 서로를 시민과 시민 간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왜 우리 정치인들은 동료 시민들에게 말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국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동료 시민을 설득하는 것인데 말이다. ‘민심’ 운운이 아니라 동료 시민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야말로 바로 정치공동체를 위한 윤리의 시작점인 것 같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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