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어느 한 탈북 정치인의 남한 역사 부정
2023-03-06 06:00:00 2023-03-06 06:00:00
열세일 때 무리수가 따릅니다. 선거철 말이 거칠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때로는 저급하게 자신을 드러내죠. 거기에서 신념이나 가치관을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보다는 득, 손보다는 익이라는 선거 공학적 판단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본래적’인 것과 ‘비 본래적’인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양심과 죄의식이 따르지만 후자는 말에 은폐와 왜곡이 그득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때, 특히 열세일 때 ‘비 본래적’인 말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다수의 불확실성보다 소수의 강성 지지를 택하는 거죠. 그래서 말은 더 독해집니다. 아니, 독해질수록 응축된 소수의 홍위병을 만들어냅니다. 그게 자신의 정치 기반이 된다고 믿는 거죠. 허위 비방에 대한 대중의 비판보다 이로 인해 얻는 이득, 즉 지지의 결집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혐오와 위화감을 통한 저속한 매표행위는 그렇게 나옵니다. 진영 정치가 일반화된 지금 우리가 흔하게 목격하는 그릇된 정치 풍토 중 하나이죠.
 
문제는 이것이 역사가 된 진실까지도 부정한다는데 있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공격 역시 이러한 역사 부정과 날조를 통해 나타납니다. 2019년 2·27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5·18 북한군 개입’ 주장으로 당 안팎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지만원이 퍼트린 ‘북한군 개입설’은 여러 논증을 통해 허위로 판명되었죠. 그럼에도 새삼 이를 끌어내 항쟁을 폭동으로 매도하고, 희생자를 죄인으로 덧씌우는 건 어떡해서든 지지집단 눈에 들기 위함이 클 것입니다. 이를 위해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더 극단적인 단어를 동원하는 거죠. 여기에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동의 효과는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되니까요.
 
얼마 전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 입에서 또 한 번 악의적인 역사 부정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국민의힘 3·8 전당대회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죠. 당 최고위원에 도전장을 내민 태영호 의원은 제주 4·3사건이 ‘김일성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유가족들 가슴을 후벼 파는 막말의 근거는 “북한에서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이미 제주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없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관련 자료 역시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보수 진영에서 그토록 추앙하는 백선엽도 “당(남로당 제주위원회)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봤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백선엽은 1948년 4월 11일 통위부(국방부) 정보국장에 임명돼 군내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그 행위가 표현의 자유나 해석의 다양성을 넘어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이 있는 것도 나치 행위에 대한 부정이 곧 공공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태영호 의원 발언은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했습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순 있지만 거짓을 말하고도 책임을 피할 순 없죠. 모든 의견이 동등하진 않아요.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엄연히 존재해요. 노예제도가 있었고, 흑사병도 있었고, 지구는 둥글고, 빙하는 녹고 있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살아있지 않죠.” 무릇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공당의 대표자를 자임한 정치인 발언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주 4·3은 국가폭력 사건입니다. 부당하고 불법적인 국가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대량 학살된 사건이 제주 4·3입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일어난 비극을 망라하죠. 때문에 그 긴 시간 동안 발생한 주민 피해와 희생에 무게를 둬야합니다. 오늘날 과거사 문제를 진실과 화해 측면에서 다루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태영호 의원 발언은 그런 점에서 유가족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2020년 7월 이인영 당시 통일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태영호 의원이 “주체사상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며 집요하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이인영 후보는 “남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맞받았죠. 태영호 의원 말처럼 북한에서 실제 그런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명확한 원인과 배경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한 채 북한에서 배웠다며 근거도 없는 선전 선동을 한다면 남한 체제에 대한 거부와 부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남한을 선택한 지금 그는 북한에서 배웠던 걸 한번쯤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가 그토록 누군가에게 질문했던 사상전향의 전제일 것입니다.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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