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새와 풀벌레 소리로 시작하는 첫 곡 ‘세멩(Semeng)’의 공감각적 잔향을 지나면, 남반구 적도 부근의 섬 발리 풍경이 펼쳐진다.
열대 숲과 에메랄드빛 바다, 수영을 하고 맥주를 마시는 호사로움, 눅눅한 침대와 천장을 기어 다니는 도마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와 기타의 공간계(리버브, 딜레이) 사운드가 맞물려 번지고 늘어지듯 이완의 느낌을 준다. 뒤따르는 퍼커션(윈드차임, 띵샤, 콩가)의 울림들에 ‘가믈란 음악’의 영적인 환상도 잠시 겹쳐진다.
“자연의 소리와 닮은 악기들을 모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최근 스페셜 앨범 '앤젤 빌라'를 낸 밴드 CHS 멤버들. 사진/CHS
최근 서울 모래내 시장에 위치한 소규모 공연장 ‘극락’에서 만난 밴드 CHS 멤버들이 말했다.
2018년 싱글 ‘땡볕’으로 데뷔한 CHS는 ‘아폴로 18’의 최현석과 ‘전국비둘기연합(전비연)’의 김동훈을 중심으로 프로듀서 박문치(키보드), 최송아(베이스), 송진호(퍼커션), 양정훈(드럼) 6인조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정규 1집 앨범 ‘정글사우나’를 발표한 이래, 특유의 편안하고 나른한 사운드를 안착시켜가고 있다.
지난달에는 코로나 직전 ‘발리’에서 한 달간 머물며 작업한 6곡을 수록한 스페셜 앨범 ‘앤젤 빌라(Angel Villa)’를 내놨다. 앤젤 빌라는 실제 이들이 한 달간 묵은 현지 풀빌라 명.
“안식처 같은 곳이었죠. 일어나면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었어요. 서핑, 수영, 태닝, 음악, 도마뱀 관찰... 그러고 나선 늘 노을 밑 바다에 다다르곤 했어요.”(최현석)
앨범을 돌리는 순간 동남아의 나른한 풍경이 시간 순으로 흘러간다. 한국말로 아침을 뜻하는 첫 곡 ‘세멩(Semeng)’에선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프라펫-5’의 뭉근한 사운드가 발리 일출의 빨간 셀로판지 같은 감성을 그려낸다.
최근 스페셜 앨범 '앤젤빌라'를 밴드 CHS. 사진/CHS
2번곡 ‘비치워크’부터 3번곡 ‘라스트 선셋’으로 이어지는 구간부터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기타의 공간계 음들 위로 퍼커션, 플롯 소리들이 겹쳐진다. ‘자연주의 칠링 뮤직’이나 ‘트로피컬 사이키델릭 그루브’를 표방하는 이들 음악은, 록의 어법으로 그려낸 멜로우 팝이나 스무드 재즈처럼도 들린다. 4번곡 ‘Slowride’의 후주 부분에서는 아예 슈게이징풍 소음의 탑을 쌓아버린다. 그간 헤비니스, 슈게이징(아폴로18)과 프로그레시브록, 팝펑크(전비연) 같은 ‘선 굵은 소리’를 탐험해온 최현석과 김동훈이 변칙을 줬다.
“(‘Slowride’는) 빗물을 가르며 2인 1조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날의 긴장감을 표현한 곡이에요. 이제 장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제 자신을 얼마나 솔직히 음악에 투영했나 질문하곤 해요. 아티스트로서 음악이란 예술을 대하는 데 중요한 태도 같아요.”(최현석)
그간 솔로와 치스비치 같은 프로젝트로 뉴 잭 스윙 같은 80~90년대 복고음악을 선보이던 박문치는 “CHS는 프로듀서 박문치로서 보여줘야 할 것이 아니라, 한 멤버로서 같이 여행가서 느꼈던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라며 “즐기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스페셜 앨범 '앤젤빌라'를 밴드 CHS. 사진/CHS
CHS는 그간 바다나 숲속으로 직접 악기, 음향 장비를 짊어지고 들어가는 공연도 진행해왔다. 오는 11월13~14일에는 제주도를 돌며 찍은 음악 다큐멘터리 ‘CHS 슬로우라이드 라이브’를 음악플랫폼 밴드캠프에 공개한다.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이 머무는 집이나 고추가 널린 마당 같은 곳을 돌며 앨범의 메시지, ‘자연의 안락함’을 그렸다.
“시규어로스 ‘헤이마’를 넘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고생했습니다. 라이브 연주하는 멤버들과 조명팀, 음향팀 간 손발이 맞아야 했고, 아쉬운 부분도 물론 있습니다. 그래도 사명감은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간 한국에서 시도되지 않은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최현석)
최근 스페셜 앨범 '앤젤빌라'를 밴드 CHS. 사진/CHS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청자들이 어떤 공간으로 느끼면 좋을지 물었다.
“1인용 소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니까. 개인적이기도 하고.”(최송아)
“그렇게 말하니까 우주 같은 게 생각나네. 홀로 있는 위성처럼 쓸쓸한.”(김동훈)
“요즘 20대 중에 고독사 하는 분들이 많다고도 들었어요. 그런 분들을 구할 수 있는 끈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어요.”(최현석)
듣고 있던 박문치가 말을 잇는다.
“나는 꿈.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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