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20세기 율사들의 21세기 대권 경쟁
2021-07-02 06:00:00 2021-07-02 06:00:00
여권과 야권의 대선 후보 적합도 지지율 1위인 두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이 이틀새 이어졌다. 최근 한국사회연론연구소가 TBS 의뢰로 조사한 6월28일자 대선 후보 적합도에서 윤석열, 이재명 두 후보는 팽팽하게 1, 2위를 다투는 모양새다. 대선 후보로 나열된 인물들의 면면을 살핀다. 무려 9수를 거쳐 사법고시를 통과해 검사의 꽃이라는 검찰총장이 된 60세 중년 남성, 소년공으로 어렵게 자라 역시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 경기도지사가 된 55세 중년 남성, 이 두 사람이 현재 대통령에 가장 근접해 있다. 그 뒤로 68세의 기자 출신 국무총리와, 이미 한번 대통령에 출마했던 67세의 검사 출신 국회의원, 그리고 판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법무부장관을 지낸 62세의 여성이 보인다. 기자출신의 후보를 제외하면 1위에서 5위까지의 후보 중 무려 4명이 율사 출신이다. 한국 정치판은 율사들의 놀이터다.
 
202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리더의 면면을 살핀다. 가장 위에 보이는 인물은 안쏘니 파우치 박사다. 코로나19 사태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며 그나마 미국의 방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 과학자다. 그는 평생 미국립보건원의 감염병연구소장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지만, 미국 국민들에게 그 어느 정치인보다 더 강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됐다. 타임지는 지도자 파우치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써두었다. “파우치 박사는 감언이설을 내뱉지 않았고, 정치인들에 의한 압박에 저항했다. 그는 오직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표 하나로 어렵게 진실을 전달해왔다. 우리는 이 힘든 시기를 건너게 해준 그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진실성에 감사해야 한다.”
 
조셉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 시진핑, 앙겔라 메르켈, 차이잉원 등 세계 각 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한국의 정치지도자는 한 명도 없다. 유일한 한국인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다. 정은경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예방의학을 전공한 55세의 여성 의사다. 의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분야 중 하나인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월급도 적은 국립보건원에서 역학조사담당관으로 근무했으며, 메르스 사태에서는 최전선에서 일하다 메르스 종식 이후 정직까지 당했다. 메르스 사태를 발판으로 삼아 정은경이 차분히 준비해뒀던 대응체계 덕분에, 한국은 그나마 코로나19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소수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정은경과 안쏘니 파우치가 2020년 타임지의 정치지도자 목록에 오른건,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타임지가 꼽은 여러 분야의 선구자, 예술가, 거인들을 살펴보면,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은 젊고 역동적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 중에, 한국인은 없다. 한국이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극단적인 이념과 세대 갈등으로 정치와 뉴스가 도배되고 있을 때, 중국은 과학기술 최강국의 지위를 차지했고, 구글은 딥마인드로 인공지능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테슬라와 아마존의 대표들은 앞다퉈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 한국은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새로운 한국을 만들 정치지도자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파악하고 지켜내야 한다. 공정이 대선의 새로운 화두가 됐지만, 그건 당연히 지켜졌어야할 상식일 뿐이다. 국가의 미래를 빼앗기고 난 후에 공정을 말할 수는 없다. 정확히 100여년 전, 우리는 충효를 말하는 무능한 조선시대 선비들 덕분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야 과학기술과 국가경쟁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 지금의 세계도 당시와 전혀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 경쟁력에서 우위를 빼앗긴 나라는, 언제나 기술강국에게 굴종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나라는 과학기술경쟁력이라는 붉은여왕의 경주를 하고 있다. 당연히 공정과 청년과 여성과 상식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가 가능한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길을 내야만 한다. 그것이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다음 대통령이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책임의식이다.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두 대권 후보의 출마선언문 전문을 읽는다. 이재명 도지사의 선언문에서 과학기술을 통한 전략은 “미래형 인적자원 육성시스템으로 기초 및 첨단 과학기술을 육성하고 문화컨텐츠 강화를 위해 문화예술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라는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여느 정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세계가 디지털대전환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를 ‘위기’로 표현한다. 현장 과학기술자들과의 대화에서 과학기술을 동학혁명군을 사살한 일본의 캐틀링건에 비유했던 것에서도 이재명의 과학기술에 대한 견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에게 과학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그는 이번 출마선언문의 제목을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을 향해가야’한다고 정했고, 도올의 ‘동경대전’ 발매에 직접 전화를 해서 동학혁명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이재명은 공정과 정의에 충실한 정치인이지만, 20세기형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구시대적 인물이다.
 
윤석열의 출마선언문에는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 사회는 인권과 법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핵심 첨단기술과 산업시설을 공유하는 체제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외교 안보와 경제, 국내 문제와 국제관계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쟁도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칩으로 싸웁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대한민국이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확고한 정체성을 보여주어 적과 친구, 경쟁자와 협력자 모두에게 예측가능성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 사회 시스템의 토대가 되는 기술 기반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초고속 정보 처리 기술이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 혁명에 따른 사회 변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해 오던 방식대로 일하는 것만으로는 국제 분업 체계에서 낙오되어 저생산성 국가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기술 혁명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과 경제 사회 제도의 혁신이 필수입니다. 혁신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 자율적인 분위기, 공정한 기회와 보상, 예측가능한 법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 공정과 상식, 법치의 자양분을 먹고 창의와 혁신은 자랍니다.”
 
언젠가 쓴 책에서,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과학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사실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은 과학과의 아마게돈을 선포하고 있다”라는 <버려진 과학> 저자들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도대체 왜 한국의 진보세력은 과학기술이라는 미래전략을 포용하고, 그 기반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heterosis.kim@gmail.com)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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